비드라마 이야기

선생도 점백이 김씨였다.

첫날 2006. 10. 23. 13:41
 

 

1.선생도 점백이 김씨였다.

 

 <2006년 10월 23일.

 새벽에 눈이 떠졌다.연 이틀이나 계속된 술자리를 무사히 마쳤다는 생각에

몸도 마음도 가벼웠다,

 (아 사진 찍으러 가야지)

 1년전에 찍어온 사진을 아무리 찾아도 찾을길이 없어 모처럼 홀가분해진 기분으로

그 사진을 찍기위해 길을 떠날 생각이었다>  
  

 모란공원은 경춘선 가도에 있다.

 

 

 구리시를 지나서 남양주시, 그리고 마석을 지나면 바로이다.

 2005년 11월 8일

 늘 생각은 하면서도 그동안 미적미적 미루어 왔던일을 오늘은 결행 하기로 했다.

 김희갑 선생 묘소를 참배 하는 일이다.

 

 잘 가꾸어진 수목 사이로 질서 정연하게 늘어서 있는 묘소 사이를 지나면서 죽음이 주는 무게보다 분위기가 너무 칙칙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 죽음은 늘 이렇게 살아 있는 사람과 격리되어 있는것일까?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어울어지는 보다 밝은 분위기는 없을까?

 

 관리 사무소엘 들렸다. 직원이 밖으로나와 친절하게 위치를 가르쳐 주었다.

 들어오는 입구쪽에 백련사란 절이 있는데 그 후문 위쪽이 예술인 묘역이라고 했다.

선생의 묘소는 예술인 묘역 1호라고 했다.

 

 


  어림짐작으로 예술인 묘역을 찾았다. 둘러보니 <장로> <성도>라고 쓰인 묘석만 눈에 뜨일뿐 예술인이라고 기억되는 묘소는 없었다.

  다시 물어볼 요량으로 나오다보니 배추밭 옆에 10여기의 묘소가 있었다. 공터까지 다 합치면 20기쯤 들어갈까?

맨 오른쪽 배추밭의 경계 근처에 선생의 묘소가 있었다.

  <영화배우 김희갑의 묘>

 

 

아아  선생님 늦었습니다.이제야 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문득 그날 생각이 떠 올랐다.

 

1975년 3월 14일,

당시로선 최신예 기종인 대한항공의 DC-10 여객기(KE901)가 힘차게 김포공항의 활주로를 박차고 창공으로 솟아 올랐다.

서울-파리간 구주여객노선의 역사적인 첫 취항이었다.

 

 

215명의 탐승객 중엔 당시의 김동조(金東祚) 외무장관을 필두로 외무부 출입기자단, 그리고 KBS-TV에서 방영중인 필자의 작품 <꽃피는 팔도강산>팀이 드라마 사상 최초인 해외 로케의 흥분을 간직 한채 타고 있었다.

 

 

물론 왕복 항공 요금과 체재 비용은 드라마 협찬사인 대한 항공측의 부담이었다.


원고료로 돈 벌어, 내 돈 안드리고 해외여행 까지 하게 돼, 남들은 호박이 넝쿨채 굴러 떨어졌다고 부러워 했지만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는가?

파리에 오기 전날까지 나는 애당초 계획에도 없던 새로운 얘기꺼리를 급조 하기 위해서 며칠동안 날밤을 새워야 했다.

극중의 막내 딸인 한혜숙을 서울, 파리간 처녀 비행하는 스튜어디스로 설정해 놓고 차제에 늙으신 아버지(김희갑) 어머니(황정순) 파리 구경을 시켜드린다는 얘기인데 파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대본을 쓸 것 아닌가?

요즘은 여행 가이드 책도 많지만 당시엔 그런 책도 별로 없어서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으로 초고를 만들어 놓고 “자세한건 현지에 가서 뜯어 고치겠다”고 배짱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오죽했으면 떠나는 날 아침에 옷도 못갈아 입고 이발도 못한채 허둥지둥 여객기에 올라야만 했을까.

아무튼 17시간을 달려 우리는 토요일 오전에 대망의 파리, 오를리 공항에 도착했다.(현재는 몽골 상공을 통과 11시간 전후이지만 당시는 아라스카쪽으로 선회 하는 항로였다.)

 

 

 

 

도착 하는 순간부터 감독과 연기자, 스탭진들은 빡빡한 스케줄 때문에 콩튀듯 팥튀듯 했지만 정작 난 할 일이 없었다. 

파리의 관광 코스라는게 예나 이제나 늘 뻐언한 것이었기 때문에 감독인 김수동 형으로부터 뜯어 고치지 않아도 되겠다는 고마운 결정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시차에 적응이 안돼서 낮엔 졸리고 밤엔 언제 그랬더냐 싶게 정신이 말짱하니 할 일이라는게 마시는일 밖에 더 있나.

 대학생들의 패러다이스라는 카르디에 라뗑(라틴 쿼터)을 발견하고 그 신선한 분위기에 미쳐 매일같이 거기서 살다시피 했다.

 세계 백 여국의 나라 대학생들이 모인다는 싸구려 카페에서 ‘스마일’과 ‘보디 랭귀지’로 맥주잔을 부디쳤고 낮에는 작취미성의 게슴츠레한 눈으로 오스트리아 시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그랬듯이 뤽상부르 공원의 벤취에 앉아서 흰둥이 깜둥이 노랭이, 젊은 것 늙은 것, 연인들 아이들을 살펴 보다가 꼬박꼬박 졸기가 일수였다.

 

 그러다가 정신이 들면 앙드레 지드가 살던 거리, 싸르트르가 사는 집, 까뮈가 드나들던 카페를 찾아 어슬렁거리고.....

 오죽 그 맛에 취했으면 ‘파리에 가면 우선 그 유명한 메트로부터 한 번 타 봐야지, 하고 별렀는데 우리가 묵고 있는 오페라좌 근처의 스크리브 호텔앞에서 불과 50미터만 걸어가면 지하철 구멍이 있는데도  2주일 내내 거길 한 번도 들어가 보질 못했을까.


 그러든 어느날이었다.

 늘 우중충한게 파리의 날씨였지만 아침부터 비가 내렸고 또 특별히 가 보고 싶은곳도 없어서 호텔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데 뜻밖에도 나와 같은 방을 쓰고 있는 김희갑선생이 들오셨다.

 

 

“아니 촬영 안 하십니까?”

 그날은 나폴레옹의 유해가 안치 되어있는 앵발리드와 그  근처에서 로케를 하기로 했고 장면도 길어서 저녁 늦게나 촬영이 끝날걸로 생각 했었는데 감기 기운이 있는 김선생을 배려 해서 감독이 선생이 출연하는 장면만 먼저 찍고 일찍 해방을 시켜 줬던것이다.

“점심 안 먹었지? 초밥 사왔는데 같이 먹자”

나는 먹다 남은 양주병 부터 꺼내 들었다.

“또 술이야?”

선생이 짐짓 인상을 썼다.

“기가 막힌 안주가 있는데 한잔 안할수 없죠. 선생님도 한잔 하십시오. 촬영도 끝 나셨겠다 홀가분하게 한 잔 하시고 푸욱 주무시면 감기 기운부터 싹 가실겁니다.”

“그래 볼까? 그럼 딱 한잔만...”


선생은 방안에 있는 물컵으로 3분의 1잔쯤 마셨고 나는 반병쯤 남은 양주를 홀작이며 다 들이켜 버렸다. 일단 발동이 걸리니 천성적인  비행소년적 장난끼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도 김해 김씨 맞죠?”

“응 왜?”

“김해 김씨는 거시기에 점이 있다는데 그게 사실입니까?”

“아암 사실이지. 점이 없는 사람은 김해 김가가 아냐”

“그럼 선생님도 거기에 점이 있겠네요?”

“아 당연히 있지”

이미 나는 오늘 김선생의 아랫도리를 벗겨 봐야겠다는 치기 어린 작심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그동안 말이 룸메이드지 대 선배인 김선생과 한방을 쓰다 보니 으레 자잘구레한 수발은 내가 들어 드리지 않을수가 없었고 술에 취해 들오는 날도 행여 주무시다 깨실세라 고양이 걸음을 걸어야 하는 것은 물론 ‘코 고는 소리에 한숨도 못잤다’는 소리가 나올까봐 벼개에다 코를 박고 잔게 어디 한두번이었던가?  오늘은  설욕을 해야지. 

“에이 찾아 보면 점이야 누구나 다 있는 것 아닙니까? 유독 김해 김씨라고 해서 점이 있다는건..”

“허어 이사람이 몰라두 한참 몰르는구만? 우리 김해 김가들은 꼭 거기에 점이 있어”

“믿을수가 없어요”

“아 있다니까?”

“원 선생님두 참 ..아니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이 친구가 정말?”

 

 내 악의적인 발상을 미쳐 모르시는 선생이 순진하게 내 페이스에 말려드는 순간이었다.

“전 말만 들었지 한 번도 보질 못했거든요? 보지 않은걸 어떻게 믿습니까?”

“야 이눔아 너 하느님 봤냐? 너 부처님 봤어?”

선생은 언성을 높이면서 부릅뜬 눈으로 나를 노려 보고 계셨다.

내가 노리는게 바로 이 순간이 아닌가? 이제 밑돌 하나만 더 빼면 나를 대하는 선생의 그 점잖은 성(城)이 와르르 무너져 내릴 것이다.

 

“에이 그거 하구 하느님 하구 부처님하구는 다르 잖아요?”

“뭐?”

“그럼 어디 한 번 보여 주십시오”

“뭐 뭐 뭐 뭐라구?”

“제 눈으로 확인을 해야죠. 그 담엔 저도 김해 김씨들은 모두 거기 점이 있다는걸 믿겠습니다”

“아니 이런 맹랑한 놈 봤나?“


이제 마지막 한 순간!

“없죠? 없으니까 못 보여 주시는거죠?”

“그래 이눔아 봐라 봐,”

선생이 벌떡 일어나 쟈크를 내리고 거시기를 꺼내 놓았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은채 나는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짐짓 보물을 감정하는 감정사처럼 심각한 얼굴로 거시기를 살펴 보았다.

“없잖아요?”

“없긴 왜 없어 임마? 그렇게 들여다봐서 보이냐? 쳐들어 봐.밑에 있어 밑에”

“잠깐만요”

나는 욕실로 뛰어 들어가 물을 틀어 놓고 숨죽여 킬킬 댔다.


 아무리 근엄한척 심각한척 해봐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뭘 하는거야?”

“네 나갑니다”

 선생은 거시기를 내 놓은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 서있다가 욕실에서 나오는 나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셨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내 손엔 방금 초밥을 먹었던 나무 젓가락이 깨끗이  씻겨진체 공격형의 게발 처럼 들려 있었던것이다.

“야 그건 또 뭐야?”

“에이 제가 어떻게 감히 선생님 거시기에다 손을 댑니까? 정말로 밑에 점이 있는지 없는지 이걸로 한 번 뒤집어 볼라구요”

“뭐 뭐야?”

어처구니가 없는 듯 선생이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야 임마 치워, 치우고 손으로 뒤집어봐 밑이야 밑..”

“네 죄송 합니다. 손도 씻었으니 그럼..”

나는 조심스럽게 선생의 거시기를 들어 올렸다.

우연의 일치였을까? 그것은 진짜였다. 좁쌀 보다는 크고 팥 반쪽보다는 작은 검은점, 모든 김해 김씨 후손들이 지니고 있는 징표라면 이것이야말로 문중의 신비가 아니고 무엇이겠나?

나는 순간적으로 2천년의 세월 저편에 있는 한 인물을 떠 올리지 않을수가 없었다. 가락국의 시조이자 김해김씨의 시조인 김수로왕!

“있어 없어?”

“네 있습니다 죄송 합니다”

선생은 소중하게 거시기를 도루 집어 넣으면서 폭소를 터뜨렸다.

“나 원 살다 살다 별 미친눔을 만나 가지고..하하 ”

 

왕도가야(王都伽倻)인 김해를 향해 경부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어느 휴게소에 들려 <불효자는 웁니다> CD를 사서 틀었다.

새삼 선생의 묘소 옆을 지키던 시비가 생각 났다.

 

 

<불효자는 왜 울었는가?

울다간 영혼이여

실향의 애틋함에

울고간 님은

만인의 심금을 울려주고

웃겨준 합죽이의 인생

짧다 하지만

님의 소리

님의 모습

님의 이름 김희갑

청사에 길이 남으리라>


백파 최은휴선생이 쓴글이다.

한국문인협회 부천지부장과 한국예총 부천지부장을 역임했던  시인이자 소설가인 백파 선생도 지병으로 2002년 1월 김희갑 선생을 따라 갔다.   .

나는 선생과의 마지막 해후를 떠 올리며 다시금 감상에 사로잡혔다.


선생이 대수술을 받고 오랫동안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얘기를 뒤늦게 듣고 송구스러워서 전화를 들였더니 이젠 완치가 되어서 바깥출입도 하신다는것이었다.

여의도 사학회관의 스카이 라운지에서 김수동 감독과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선생은 왼쪽 바지를 걷어 올리며 수술자욱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여기까지 째고 동맥과 정맥을 완전히 바꿔 버린거야. 그 수술을 하는데 72시간이 걸렸대. 말하자면 사흘동안 내가 죽어 있었던거지”

“그럼 사후 세계라는것도 보셨겠네요?”

어쩔수 없는 이 저질성 개구쟁이 기질....

“아냐 아냐 그런거 없어.부처님두 없구 예수님도 없었어. 그냥 깜깜해. 깨어나 보니까 사흘됐다는거야”

 

그로부터 한달여인 1993년 5월18일, 선생은 향년 70세로 타계 하셨다.

 

선생은 1923년 7월 18일 함경남도 장진에서 태어 났다.

장진 공립보통학교를 거쳐 1941년 회령(會寧) 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메이지[明治]대학 상학과(2년)를 수료하였다.

1945년 8․15광복 후 월남하여 서항석(徐恒錫)의 문하로 들어가 반도가극단에서 무대연기를 수련하였다. 1956년 한형모(韓瀅模) 감독의 《청춘쌍곡선》에 영화연기자로 데뷔, 《오부자(五父子)》《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서울의 지붕 밑》《빨간 마후라》《팔도강산》 등 7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고, 《꽃피는 팔도강산》《제삼지대》 등 텔레비전 프로에도 다수 출연하였다. 󰡐합죽이󰡑라는 예명으로 서민의 애환을 코믹한 연기로 대변하여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젠 아실 것이다.

내가 얼마나 한 시대의 연예계를 풍미해 오신 선생의 문화사적 업적을 존경 하고 상하 격의 없는 인간관계를 유지 할수 있는 꾸밈없는 그 소박한 성품을 사랑해 왔는가를.

 그리고 내 평생 처음으로 찾아온 <환갑>이라는 <낯선 손님>앞에서 ‘이제는 내 남은 여생을 걸고 전파와 함께 떠나가 버리는 허망한 픽션이 아니라 이 땅 구석구석에 산재한 위인 영걸들의 뜨거운 숨결을 찾는 넌 픽션의 길을 찾아 떠날 것이며 선생의 관향이자 아직도 신비의 베일에 가려진 가락국의 왕도, 김해를 그 첫 출발지로 하겠다“고 결심한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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