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8년(태조 7년)음 8월 26일, 밤
2경이라고 그랬으니 밤 열시부터 12시 사이다.
이방원의 사병들이 송현 마루에 이르렀다.
안산군수였던 이숙번이 군사를 끌고 왔다.
그는 순번에 따라 정릉 경비대로 파견 나와 있었다.
“골목안에 있는 남은의 애첩 집에 정도전등이 모여 있습니다”
이숙번의 말에 이방원이 다가가보니 그집 문밖에는 말 몇 마리가 안장을 풀지 않은 채 매여져 있고
종들은 다 잠이 든듯 했다.
방안에서는 정도전과 남은 등이 모여 앉아 웃으면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날이 정도전의 거사일이라고 했다.
즉 정도전이 어린 세자를 끼고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루기 위해서
이방원등 왕자를 제거 하는 친위구타를 기획,
태조 이성계의 병이 위증하다는 핑계로 왕자들을 대궐로 불러 들인다음
내노비들과 갑사들이 공격을 하고 정도전과 남은등은 밖에서 응하기로 했다는것이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의 이날의 기록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아니 앞뒤가 맞지 않는것은 둘째치고 너무 허술하다.
오늘날의 참모총장격인 삼군부 판사를 지낸 정도전이었고
그날이 거사 당일이었으면 당연히 호위 군사들이 있었을텐데
<종들은 모두 자고 있었으며 정도전과 남은 등은 등불을 켜 놓고 모여 앉아 웃으면서 얘길 하고 있었다>는 대목에서는
혁명 당일의 긴장감이라고는 전혀 느껴 볼수가 없다.
어쨌던 이숙번의 지시에 의해 군사들이 이웃집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놀라서 뛰쳐 나오는 사람을 무차별 사살 했다.
정도전만은 가까스로 빠져나와 이웃집으로 피신했는데
<배가 볼룩한 사람이 우리집으로 숨어 들어왔다>는 집주인의 고발에 의해서
현장에서 잡혀 죽고 말았다.향년 56세.
정도전의 죽음을 전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더욱 비참하다.
<정도전은 안방에 숨어 있다가 소근(이방원의 종)등이 밖으로 나오라고 소리치자
짤막한 칼을 손에 쥐고 벌벌 떨며 기어나왔다.칼을 놓으라고 소리치니 도전은 칼을 내 동댕이 치면서
“죽이지 말라 한마디만 하고 죽게 해달라”고 했다.
그리고는 정안군(이방원)의 말앞에 이르러
“옛날에도 공이 나를 살려주셨으니 오늘도 살려주기 바랍니다” 라고 했다.
옛날이란 임신년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었다.
정안군은 말하기를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고서도 부족한것이 있느냐? 왜 이리 악행을 저지르느냐?”
하고 “목 베어 죽이라”고 했다>
여기서 얘기한 <임신년>은 1392년 이성계가 벽란도에서 낙마 하였을때를 말한다.
정몽주는 이것이 기회라 여기고
즉시 정도전 조준등 혁명파인 이성계 일파에게 반격을 가했고
귀양지에 있던 정도전을 죽이라고 밀명을 내렸다
그때 마침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격살하여 정도전이 살아 남게 된것이다.
역사는 승리 하는자의 기록이란 말이 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영원히 역사에서 매장 하고 싶었으면 얼마던지 가능했을것이다.
2006년 3월1일
음산한 날씨에 눈발 조차 오락가락 했다.
(도담 삼봉에나 다녀 와야겠다)
단양에 있는 도담 삼봉은 그동안도 몇 번이나 가본곳이었다.
제천에서 가면 매포와 신단양 사이에 있고
반대로 단양 시내에서는 제천쪽으로 3키로 정도 거리에 있다.
그런데도 불쑥 또 가고 싶었던것은 정도전의 출생지가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때문이었다.
정도전은 경북 봉화 사람이다. 출생지는 외가였던 단양으로 알려져있다.
도담 삼봉에서 만난 사진사는 내가 정도전의 단양 출생설에 대해서 의문을 표시하자
한손을 저으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천만에요 저기 저 아파트 짓는거 보입니까? 거기가 도전리에요
정도전이 도전리에서 출생했다 그래서 이름이 도전이에요 또 삼봉이란 호가 있잖습니까?“
도전리는 1985년 7월 15일 행정구역 조성시
매포읍 도전리에서 단양읍으로 편입된후 인구증가로 1,2,3리로 분활되었다.
한자로는 道全 ,道田, 道傳으로 변천되어왔고 현재는 道田이다.
도전리와 인접 되어 있는 마을이 별곡리-벼르실이다.
정도전은 도전리와 벼르실 사이의 경계지역내에 있는 외딴집에서 태어 났다고 한다.
“그당시엔 동네 이름이 없었다고 봐야지요. 도전이가 태어난 동네, 도전이네 동네,
도전이 도전이.... 하다가 동네 이름이 도전이가 됐다고 봐야지요”
단양군청 문화관광과의 관광기획담당인 김동식씨의 얘기다.
또 자를 종지라고 했는데
신기하게도 그 지명 역시 단양에 있다.
현재의 단양군청 앞에 있는 산이 바깥 종지봉과 안 종지봉이다.
종지란 간장 고추장을 담아 상에 놓는 작은 그릇을 말한다.
산봉우리가 꼭 종지를 엎어 놓은 형상을 닮아서 종지봉이라 했다.
이것 역시 정도전으로 하여 종지봉이 된것인지
종지봉이 먼저 있어 정도전의 자가 된것인지 헷 갈린다.
도담 삼봉은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의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세 개의 봉우리를 말한다.
가운데의 늠름한 모습이 장군봉(남편봉)이며
오른쪽에 교태를 머금고 있는게 딸봉(첩봉)
왼쪽에 얌전하게 돌아 앉아 있는것이 아들봉(처봉)이다,
말하자면 정도전은 삼봉을 오가며 호를 얻었고
도전리와 종지봉은 정도전으로 하여 땅 이름을 얻었다는 가설이 성립 될듯도 싶다.
3월12일, 꽃샘 추위라지만 강풍이 불고 체감온도가 한 겨울을 방불케 했다.
나는 정도전의 본향인 봉화를 향해 차를 몰았다.
정도전의 생가는 경북 영주시 이산면 신암리로 기록되어 있다.
애당초 봉화군이었지만 행정구역 개편으로 영주시가 됐다.
영주에서 봉화로 가는 지방도 중간쯤에서 왼쪽으로 꺾어져 들어간 동네인데
통일신라기로 추정 되는 <신암리 마애삼존불>이 있어 찾기는 쉽다.
그곳에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1304-1366) 내외의 묘와 당우 모현사가 있고
문천서당이 있다.
문중에서 모현사 개축 공사를 하고 있어 주변이 어지러웠다.
관리인인 정동호씨를 만나 봤다.정운경으로부터 22세손이 된다고 했다.
“여기가 삼봉 선생 생가지요?”
“아닙니더 생가는 따로 있심더”
이곳은 1366년 정도전이 부모상을 당하여 3년간 여막살이를 했던곳이라고 했다.
(정운경 묘소옆에 있는 사당 모현사 전경)
정동호씨도 <영주문화원>의 기록 대로
정도전이 영주시 구성공원 아래에 있던 <삼판서 고택>에서 태어난걸로 믿고 있었다.
삼판서 고택이란 애당초 정운경이 지어서
사위인 평해황씨 황유정(1343-미상)에게 물려주었고
황유정이 다시 사위인 예안김씨 김담(1416-1463)에게 물려준 집인데
세 사람이 모두 판서를 해 서 그렇게 불리워지고 있다.
삼판서 고택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영주시에서 순흥 <소수서원> 옆에 야심적으로 새운
<선비촌>에 고택을 재현 하기로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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