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드라마 이야기

정도전을 찾아서 3

첫날 2012. 5. 7. 15:23

 

 

 

 


 

 소수서원의 선비촌을 거닐면서 나는 단양과 영주에서 들을수있는 정도전의 출생설에 또 하나의 이설이 있음을 생각했다.

 

 정도전의 아버지인 정운경은 유학자였다. 슬하에 3남1녀를 두었는데 장남인 도전(道傳)은 <도를 전하고> 차남인 도존(道存)은 <도를 간직하고> 삼남인 도복(道復)은 <도를 회복하라>는 뜻에서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또 <삼봉>이란 호는 정도전이 재야 시절에 서울 북한산 아래에 있는 삼봉이란 마을에서 후학을 가르칠때 <학문>과 <경륜>과 <처세>에 오뚝한 봉우리가 되라>는 뜻에서 친구들이 지어주었다고 한다. 또 그의 자 종지도 <으뜸>이라는 의미가 있어 장차 학문과 경세에 으뜸이 되겠다는 정도전의 의지가 표명된것이 아니겠는가 여기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단양의 도담 삼봉에 세워진 <정도전상>에는 분명히 정도전의 출생지가 단양이라고 못 박고 있으며 서울대학교의 한영우교수도 그를 인정하고 있다.

 도담 삼봉에서 삼봉이란 호를 따 오고 북한산 기슭에 은거 할때 그 자신이 옛집을 일커러 삼봉, 또는 삼봉재라 하지 않았는지....


 

                                         (도담 삼봉에 세워진 정도전의 상.봉화정씨 문중에서 세웠다)

 

  단양쪽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에 대해서 또 이런 얘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정운경이 젊었을때 관상쟁이를 만났는데 “10년후에 결혼을 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얻을수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정운경은 이 말을 믿고 10년간 금강산에 들어가 공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담 삼봉에서 비를 만나 어느 초막집에 유숙하게 됐는데 그곳에서 우씨 소녀를 만나 정도전을 낳게 되었다고 한다. 정운경의 나이 38세때였다.


 정도전이 직접 쓴 아버지 <정운경의 행장>에 보면 봉화정씨 조상들은 대대로 그 지방의 향리를 지냈다.

 그의 고조이자 봉화정씨의 시조로 되어 있는 정공미(鄭公美)가 향리의 최고 지위인 호장을 지냈고 증조인 영찬(英粲)은 비서랑동정(秘書郞同正)이라는 향리의 하급직을, 할아버지인 균(均)도 검교군기감이란 종3품의 하급직을 지냈다.

 호장을 제외하고는 정한 사무가 없는 산관(散官)이었다.

 

 아버지인 운경(云敬1305-1366)만은 1326년, 정도전의 나이 8세였을때 개경에서 사마시에 급제하여 1369년에는 오늘날의 법무장관격인 형부상서(정3품)로 올랐다. 말하자면 봉화 정씨에서 처음으로 중앙 관리가 탄생한 셈이다.


 정운경은 젊어서 7세 연상의 이곡(李穀1298-1351)과 교우 했는데 훗날 이곡의 아들 이색(李穡1328-1396)과 정도전이 가까운 사이가 된것도 이런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정도전의 표현을 빌면 “아버지는 평상시에 집안의 재산을 돌보지 않고 세속의 이욕에 담박한 성품”이었으며 “집에는 모아 놓은 재산이 없고 처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면치 못했으나 깨끗하게 처신하였다”고 한다.

 시골 아전의 아들로서 이렇다할 가문의 후광도 없이 당상관의 지위에 올랐고 1382년, 아들이 역적으로 죽은 후에 편찬된 <고려사>의 양리전(良吏傳)에도 청백리 다섯명 중 한명으로 기록된걸로 보아서 그가 학문적으로도 대단했고 청렴 강직했던 인물임을 알수가 있다.


 정운경은 1363년 검교밀직 제학에 임명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영주에 돌아와 1366년 62세를 일기로 사망 했다.

 벼슬이 낮아 정부로부터 시호를 받지 못했으나 그를 아끼는 사람들이 청렴함과 의로움을 기려 <염의선생(廉義先生)>이란 개인 시호를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한영우저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그날 저녁 나는 부석사 근처의 <부석사 가는길에(634-0747)>란 팬션에서 묵었다.

 반주로 술을 시켜 놓고 젊은 주인을 청해 대작을 했다. 주인의 이름은 우성창.

 “혹시 단양 우씨 아뇨?”

 그렇단다. 우탁(禹倬1263-1342), 우현보(禹玄寶1333-1400)의 후손이란다. 이럴수가.

 

  나는 설 먹은 술의 영향도 있겠지만 정도전과 우현보에 얽힌 구원 때문에 그날밤 잠을 설쳤다.

    

  고려말의 대표적인 가문으로서 우현보 가문을 손 꼽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도전의 출생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우현보의 친척으로 김전(김전)이란 중이 있었다. 그런데 종 수이(樹伊)의 아내와 밀통 하여 딸 하나를 낳았다. 김전은 나중에 환속하여 수이를 내 쫓고 그 아내를 자기 아내로 삼았다.그리고 그딸을 선비 우연에게 시집 보내고 노비와 토지를 주었다.우연은 딸 하나를 낳았고 그 딸이 정운경에게 시집을 갔다.>

 말하자면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천출이었고 우현보 집안에서는 그 사실을 들어 정도전을 없신 여겼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선 드라마의 소재로도 빈약한 출생의 비밀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 개국을 전후한 시점에서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던 모양이다.  

 

 실록의 기록을 다시 인용해보자.

 <정도전은 처음에 벼슬길에 오를때 우현보의 아들들이 모두 정도전을 경멸 하였고 벼슬이 승진 할때마다 대성(臺省 사헌부)에서 고신(告身 사령장)에 서경(署經 사인)을 하지 않았다.정도전은 우현보의 자제들이 그렇게 하였다고 생각하고 원통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 특히 우홍수(禹洪壽 우현보의 장남)의 아들 우성범(禹성범)이 공양왕의 사위가 되자 정도전은 우성범등이 세를 타고 자신의 근원을 밝힐까 두려워 우현보 집안을 모함하는 일을 꾀하지 않는것이 없었다>


  그리하여 새 왕조의 실세로 등장한 정도전은 우현보를 귀양 보내고 그의 세 아들을 장살했다.

 물론 세 아들의 죽음에 대해서 정도전이 직접적으로 관여 했다는 증거는 없다. 단지 그로부터 11년후 다른 사건에 연루되어 옥사한 황거정 손흥종(정도전의 측근이자 개국공신)이 국문을 받는 도중 <정도전이 시켜서 그리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태조실록의 <정도전 졸기>에 의하면  “옛날에 품었던 감정은 기어코 보복 하려 하였으며 언제나 임금에게 권하기를 사람을 죽여서 위엄을 세우자고 하였다.그러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고 기록되어 있다.


 정도전의 잔혹사를 얘기 할때에 빠지지 않는것이 있다. 개국 초의 가장 부끄러운 역사라 할수있는 <고려 왕족들의 학살>사건이바로 그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정도전이 주도 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정도전이 누구인가? 이성계를 움직일수 있는 가장 측근이자 핵심 참모가 아니든가?

 

 비판의 여지는 또 있다.

 스승이자 이성계의 벗이며 신진 사대부들의 구심점이었던 이색을 죽였고 5년 선배이자 인생의 스승이었던 막역지우, 정몽주를 탄핵 했고 동문수학하던 이숭인을 장살했다.


 비판자의 시각에서 보면 정도전의 편협하고 옹졸하며 잔인했던 면모가 여실히 들어 난다.

 그러나 그가 살던 시대는 정과 사가, 정의와 불의가, 수구와 개혁이 천하를 쟁패하던 질풍노도의 시대였다.

 게다가 15년전 41세의 정도전과 의기가 투합했던 48세의 이성계는 항상 덕과 겸양을 앞세우면서 남들이 밀어 주면 못 이기는척 하고 떠밀려 올라가는 스타일이었다. 누군가 대신 총대를 메고 대신 진흙 구덩이에 빠져 주어야만 했다.

 정도전은 그 일을 자임했다. 밖으로는 정적들과 싸워야 했고 안으로는 흔들리는 이성계의 마음을 잡아 주어야 했다. 스승과 친구와도 적이 될 수있는 냉철한 책략가가 되어야 했고 피의 숙청도 마다 않는 강직한 원칙주의자가 되어야 했다.

 역사의 소명을 위해서 악역을 마다하지 않은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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