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드라마 이야기

정도전을 찾아서 4

첫날 2012. 5. 7. 15:20

경부 고속도로 상행선

안성 휴계소를 지나자 마자 왼쪽을 돌아다보면 나즈막한 야산 아래

드넓은 평야가 펼쳐져 있다.

평택시 진위면 은산리다.


그곳에 가려면 조금 더 가서 오산 톨게이트로 빠지면 된다.

아니면 경부 고속도로 상행선을 타다가 아예 안성휴게소 못미쳐서

서해고속도로 빠져 가지고 송탄 IC로 나오면 된다.



                 

은산리엔 무엇이 있는고?

바로 정도전의 사우인 문헌사와 삼봉 목판이 보존된 기념관이 있다.

이곳은 용인과 안성 평택의 3곳 접경지대로서 봉화정씨 후손들이 600년간 세거해온

유서 깊은 마을이다.

 


 


이 마을에 최초로 정착해온 분은 정도전의 종손으로서 한성판윤 용인현령을 역임해온

정영이다. 정영이 벼슬을 내 놓고 이 마을에 은거 하면서 봉화정씨 집성촌이 되었다.

지금은 1백 여호의 마을이다,

여기서 의문이 남는다.

정도전이 조선왕조 500년동안의 역적이라면 당연히 멸문지화를 당했을텐데

그 손자가 한성판윤과 용인현령을 역임했다?


사실이었다.

정도전에겐 네 아들이 있었다. 사건 당시 큰아들은 이성계의 함흥막사에 있어

화를 면하였고 작은 아들 유와 셋째아들 영은 아버지를 구하러 갔다가 죽임을 당했고

막내 아들 담은 형제들이 비명횡사 했단 말을 듣고 집에서 자살 했다.


유일하게 살아 남은 큰 아들 진은 전라도 수군에 충군 되었다가 태종 7(1407)년에

나주목판사로 기용되었고 세종5(1423)년 공조판서 1425년에는 형조판서가 되었다.

그의 손자 문형은 세조때 우의정을 지냈고 문형의 아들 숙지는 이조참판에 그리고 그

아들 원준은 성종의 사위가 되었다, 


이럴수가 있는가?

정도전은 훈일등의 좌명개국공신이다 공신도감에서 제정한 포상 방식에 의하면

<적장자는 세 등급 위의 음직에 임용하며 대대로 녹을 이어받게 하고

영구히 죄를 용서 받는다>로 되어 있다.

정도전의 후손들도 이 포상 원칙에 적용되지 않았을까?

그러나 아무리 특혜를 인정 한다고 해도 개인적인 능력이 없고서는

그토록 영달하지 못했을것이다,


하여튼 정도전은 조선조 500년동안 역적이었다.

그런데 이 역적에 대하여 호의를 보인 임금이 딱 두명 있다. 영조와 정조였다.

<말에서 떨어진 때를 잊지 말라>

이것은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벽란도에서 와병중일때

이것이 기회다 하여 정몽주가 이성계를 제거 하려다가 오히려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타살된 사건을 말한

정도전은 늘 이성계에게 이 이야기를 하면서 초심을 잃지 말기를 권했고

개혁군주 영조는 훈신들에게 <경계하고 또 경계하라>는 당부를 할때

여러차례 이 말을 인용했다. 또한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는

정도전의 뛰어난 면모와 사상이 응축된 <삼봉집>을 간행 했다.


여기에 정도전을 복권시켜 준 대원군이 더 있다.

대원군은 임진왜란때 불 태워진 경복궁을 475년(고종2년)만에 복원하고

문헌이란 시호와 함께 이성계가 하사했던 유종공종(유학도 으뜸이요 공로도 으뜸)

의 공훈을 인정 했다.

경복궁의 터를 잡고 이름을 지어준 정도전의 공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인터넷에서 퍼온 유종공종 현판)


 

정도전의 사우인 문헌사는 입구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동네 한가운데 있었다.

아무도 없어서 문닫힌 기념관 앞으로 갔더니 관리인인듯 핸드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그쪽으로 전활 걸었다.

“여기요 여기,,”

뒤쪽에서 다소 툭명한 음성이 들려 왔다. 돌아다보니 건장한 노인이 오토바이에서

내리는 중이었다. 정종봉씨 시조로부터는 23세손이요 정도전의 19세손이라고 했다.



 

만고역적으로 조선왕조 내내 천대 받았기 때문에 정도전의 묘자리는 없다.

그러나 봉화정씨 족보에는 <광주 사리현>에 실재 한다고 적혀 있었다.

또 반계 유형원이 쓴 동국여지지엔 <정도전의 묘가 과천현 동쪽 18리에 있다>

고 기록 되어 있다. 지금의 서울 우면산 자락, 서초 교육청 자리다.

1989년 한양대 박물관이 이 묘를 발굴했다. 몸통이 없이 머리부분만 발견 되었고

조선 초기의 고급 백자가 출토 되었다. 모든 정황이 정도전의 묘와 일치 하는데

거기서 지석이 발견 되었다. 지석에는 <정안지>로 되어 있었다.

역적이어서 묘라도 보존하기 위하여 가명을 쓴것인지 아니면 아예 딴 사람인지

알수가 없어 <어쨌던 조상은 조상 아니겠느냐?>면서 문중에선 정도전 사당인

문헌사 맞은편 은정골 야산에 가매장을 했다.

  


 

위에 있는것이 정도전의 사우인 문헌사 이고 아래에 있는것이 그 아들 진의 사우인

희절사다.   

 

참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왕조실록에 기록된걸 다시 한번 음미해 봤다.


<죽이지 말라 한마디만 하고 죽게 해달라> 고 웨치면서 정도전은 정안군 발앞에

꿇어 앉아 <옛날에도 공이 나를 살려 주었으니 오늘도 살려 주시기 바랍니다>하고

목숨을 빌었다. 그러나 정안군은 <네가 조선의 봉화백이 되고서도 그래도 부족한것이

있느냐? 왜 이리 악행을 저지르느냐?> 하고 <목베어 죽이라>고 했다.  


그러나 <삼봉집>에 수록 되어 있는 한편의 시는 전혀 다른 상황을 짐작케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자조>라는 시다.

엣날 선비들은 필묵을 휴대하는것이 필수 였고 정도전도 그 상황에서 글을 남겼다.


<양조에 한결같은 마음으로 공력을 다 기울여

서책에 담긴 성현의 참 교훈을 저버리지 않고 떳떳이 살아왔소.

삼십년간 세월 온갖 고난 다 겪으면서도 쉬지 않고 이룩한 공업

송현방 정자에서 한잔 술 나누는 새 다 허사가 되었구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쓴 조유식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그가 역사에 남긴 마지막 대사에는 억지로 자기를 분칠하는

바도 없고 억울 하다고 몸부림치는 바도 없다.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더더욱 없다. 그저 씁스레한 웃음이 있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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