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드라마 이야기

글을 시작 하면서(2)

첫날 2006. 10. 23. 13:38
글을 시작하면서(2)   2006/07/22 22:36 추천 0    스크랩 0
 

“너무 실망 마세요 아버지. 아버지는 회사를 잃었지만 우린 아버지를 찾았잖아요”

집까지 명도 당하고 가족들과 함께 거리로 좇겨난 날,

어느 변두리의 허름한 중국집에서 였든가?

참으로 오래간만에 가족들과 함께 짜장면으로 허기 진 저녁을 때우며

만감이 교차 하는 나에게 당시 대학에 다니던 딸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위로한 얘기였다.


사업을 한답시고 회사 한구퉁이에 군용 침대를 놓고

거기서 먹고 자고 하느라고 가족들과도 떨어져 살아온 애비는

그야말로 유구무언,

배가 고픈척, 맛있는척 그 짜장면 그릇을 바닥까지 핥았지만

그날밤은 토사 곽란으로 또 한 번 소동을 벌여야 했다.


“그러기에 송충이는 솔잎을 먹구 살아야지.

다 잊어 버리고 글이나 열심히 써”

5년동안의 공백을 넘어서 나에게 kbs-tv의 일요아침드라마 <해돋는 언덕>

을 쓰게 해준 이유황씨의 얘기다. 

kbs-tv 부국장 kbs 제작단 이사,한서대학교 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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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쟁이들이 알면 원고료도 못 찾아 갈것아냐?”

그의 배려로 <한서강>이란 필명을 또 하나 만들었다.


그러나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이니

아무리 꽁꽁 숨어도 머리카락 보고 찾아 오는 빚쟁이들을 어찌 하랴.

방송사에 나갈때는 으례 100미터 전방부터 살펴야 했고

다방 한구석에서 글을 쓰다가도 전화벨 소리가 들리면

빚쟁이들이 날 찾아 거는 전화만 같아서 가슴이 철렁 내려 앉군 했다.


또 방송 일이라는게 늘 있는것도 아니지 않는가?

어쩌다가 한 푸로를 맡아도 그게 끝나면 기약없는 실직 생활이니

글 써서 빚갚는다는 것은 너무나 요원한 일이었다.


다행히 그 와중에도 나에겐 차가 한 대 있었다.

촬영용으로 회사에서 쓰던 아시아 자동차의 15인승 미니 뻐스였는데

워낙 고물이어서 빚쟁이들도 안 끌어간 차였다.


그 차의 의자를 뜯어 내고

회사에서 쓰던 간이 침대와 책상까지 들여 놓으니

‘망한눔’의 분수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호화판의 이동 작업실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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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있거나 없거나 나는 그 차를 몰고 전국을 헤메기 시작 했다.

숲속이든 호수든 강이든 들판이든 아무데나 차를 세워 놓고

책도 읽고 글도 쓰고

라면과 소주병은 상비품이니 마시고 먹고 자고...

빚쟁이가 찾아 오나 전화가 걸려 오나 그 조그마한 공간은 나에게 있어 서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봉책이요 임시방편이었지

도망자에게 마음 편히 쉴수 있는 천국이 어디 있는가?

사람 만나는게 두려우니 마음 놓고 찾아 갈수 있는곳은 공동묘지요

선현들의 음택(陰宅)이었다.

‘비디오 족보’에 대한 한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다.


정처없이 헤메다가도 비석과 정려만 보아도 차를 세워 둘러 보았고

때로는 제각이나 묘지앞에서 술 한잔 부어 놓고 음복(陰福)을 빙자해

거나하게 취해보기도 했다.

(제발 꿈속에서라도 뵙게 해주시오)

나는 그 귀신들이랑 대작을 하고 싶었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송충이 주제에 갈닢을 먹어 볼려다가 망했습니다.

빚쟁이들이 무섭고 하루 아침에 직장을 잃어버린 내 직원들과

그 가족한테 죄를 지었고 지병으로 거동을 못하는 편모와 내 가족들이

저리 고생을 하고 있으니 염치가 없어서 얼굴을 들고 살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김삿갓 한테 떼를 썼고 율곡 우암, 성흔,송강에게 사정을 했고

내 선조인 문숙공한테 어리광을 피워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름 모를 망령들만 내 꿈길을 어지럽힐 뿐

단 한 번도 그분들은 내 꿈속에 나타나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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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은 엣 산이로되 물은 옛 물이 아니로다

주야장차 흐르니 엣 물이 있을쏘냐

인걸도 물고 같아야 가고 아니 오도다‘


허탈과 외로움으로 황진이의 시조를 읊조리다가 그대로 쓰러져

노숙을 한게 몇번이었던가?

차라리 이대로 잠이 들어 영원히 다음날 아침을 보지 못한다면

오히려 행복 할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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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든 어느날 아침이었다.

아련한데서부터 점점 가까워지는 새소리와 물소리에 놀라

숙취에 시달린 머리를 들어보니

아아 사위를 에워싸는 안개들.

바위틈에서 여기 저기 고개를 내미는 이름 모를 꽃들,

탐조등 불빛처럼 안개속에 거대한 빛의 기둥을 만들면서 쏟아지는 햇살,

그런 숲 속의 정경이 그렇게 상큼하고 이뻐 보일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발등이 가려워 무심코 내려다 보니 이건 완전히 나환자의 발이었다.

술김에 벗어 던진 양말 때문에 밤새도록 모기들이 잔치를 벌인 모양이었다.


우선 계곡의 물에 발부터 담갔다.

뼈골까지 저리는 그 시원함속에서 갑자기 내 선고(先考)와 선비(先妣)께서

그토록 열중 하시던 당신의 말씀이 떠 올랐다.


(아들아. 네 앞에 놓인 짐을 겁내지 마라.

나는 결코 네가 질수 없는짐을 너에게 맡기지 않았다.

어서 그 짐을 지고 일어나라)


아아 그것은 대각의 새벽이요 바로 부활의 아침이었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상큼하고 아름다워 보였던가?


그로부터 20년,

내 그 무거운 짐 나눠 주시려 어머님 타계 하시고

나는 아내에게 자식들 뒷바라지를 맡기고 혼자 낙향을 했다.

 

몽각가을.JPG

 

내 집필실의 허술한 조립식 벽에 붙여 놓은 한 장의 지도가 나의 화두가 되었다


(인걸도 물과 같아야 가고 아니 오도다)

아니다 물은 흘러가지만 수증기가 되고 비구름이 되어

다시 이땅을 적셔 주고 있지 않은가?

낙엽귀근(落葉歸根)의 초목(草木)은 또 어떠한가?

인걸도 그와 같아서 그 뿌리는 관향(貫鄕)이란 작은 지역에 묶여 있지만

그 족적은 전국 도처에 흩어져 있고

그 흔적은 기(氣)로 되살아나

이땅 구석구석을 그 정기(精氣)와 숨결로 채우고 있지 아니한가?


모계(母系)를 따지면

무수한 핏줄이 거기 엉켜 있으니

어찌 관향이 같은 후손들만이 그분들의 자손이 되랴.

그렇다. 핏줄 앞에 나와 남이 어디 있으며 동서가 어디 있는가?

선현들의 충과 효와 의(義) 앞에 배타와 이기가 어디 있으며

패륜과 부도덕이 어디 있는가?


내 몸속에 그분들의 핏줄이 흐르고 있고

내 뼈대 또한 그분들에게 물려 받은 것이며

이 산하 곳곳에 산재한 그분들의 숨결을 호흡하고 있거늘

어찌 우리가 나 자신을 비하할수 있으며

진흙탕 속에 함부로 내 인생을 던져 버릴수가 있겠는가?


그리하여 이제 나는 실의와 좌절의 도피처였던

내 방랑의 산하를 다시 점검 하면서

일찍이 퇴계가 그랬듯이 선현들의 숨결을 찾아 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고인도 날 못보고 나도 고인 못뵈오나

고인을 못뵈어도 녀던길 앞에 있네

녀던길 앞에 있으니 아니 녀고 어떨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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