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드라마 이야기

글을 시작 하면서

첫날 2006. 10. 23. 13:33
글을 시작하면서(1)   2006/07/22 14:04 추천 0    스크랩 0
 


1980년, 이른바 ‘서울의 봄’이었다.

어떤 정치인은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고 했지만

40대 초반의 나는 원기 왕성했고

이 봄을 내 두 번째 인생이 시작되는 첫봄으로 장식하겠다는 결의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나는 그동안 내 인생의 조강지처나 다름없는 ‘방송작가’란 직업과 과감한 결별을 고하고

몫돈으로 받은 원고료와 친구의 퇴직금까지 긁어모아

사업의 ‘사’자도 모르면서 주식회사를 설립, 대표이사에 취임 했다.


업종은 비디오 푸로덕션,

장차는 케이블 TV에까지 도전 하겠다는 만만찮은 열정을 가지고 천방지축으로 뛰어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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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조사해보니 국산 비디오 데크는 단한대도 없었고

미군 PX와 밀수입된 하드웨어가 4만여대 있었지만 상용 소푸트 웨어는 전무한 형편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는 비디오 시대가 온다. 시작하자)

맥주는 나오지도 않았는데 병따개 사업부터 시작하는 무모함을 전혀 모르는건 아니었지만

나는 곧 비디오 시대가 올것이며 그것은 시간이 해결해 줄것이라고 믿었다.


도식적인 상업성부터 탈피하자 그러기 위해선 카탈로그부터 달라져야 한다.

단 한명뿐인 여직원을 모델로 해서 <안녕하세요 미스박입니다>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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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충청북도 지사였던 김종호씨는 나를 볼때마다

<안녕하세요 미스박입니다 회사에서 왔나?>하며 나를 놀려댔다.


방송과 신문에서도 연일 호의적인 보도를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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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행히 정부에서도 관련법규의 필요성을 느끼고 시안을 마련하고 있는중이었다.

어렵게 입수해서 살펴보니 우리 같은 영세한 업자로서는 도저히 그 등록 여건을 갖출수가 없었다.


예를 들면 스튜디오의 높이는 3미터 10cm 이상이어야 되고

카메라는 최소 3대 이상을 갖추어야 하는데 그것도 해상도는 얼마 이상이 돼야 한다

등등이었다.


새로 짓지 않은 다음에야 천정 높이 3미터 10cm 되는 건물이 서울 시내 어디에 있는가?


나는 담당자를 끌고 다니며 몇 개 건물 지하실의 높이를 실측으로 보여 주었다.

2미터 90cm가 기본이었다.


카메라 문제만 해도 그랬다.

고속도로를 만들어 놓고 8기통만 달리라는 법이 어디 있느냐?

4기통으로 달리다가 돈 벌고 불편 하면 바꾸지 말래도 바꾸는 것 아니냐?

처음부터 이렇게 기준을 높여 놓으면 이땅에서 비디오 할놈 한놈두 없다.


이런 역설과 억지가 먹혀 내 회사는 개정된 음반법에 의해서 비디오 푸로덕션 1호로 등록을 마쳤다.

전국의 동업자를 망라해서 한국비디오협회도 창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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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대 이사장이었고 부이시장은 지금 한참 주가를 높이고 있는 삼화푸로덕션의 신현택 사장이었다.

오만의 극치.

그 대가는 역시 참담한것이었다.


기관 관청의 홍보물을 몇 개 맡긴 했지만 돈이 되질 않았다.

그렇다고 제작진을 놀릴수 있는가? 일거리를 만들어라.

그래서 도전한 것이 ‘비디오 족보사업’이었다.


“한문으로 된 족보는 너무 어려워

청소년들과 대부분의 사람들은 쉽게 자기 뿌리를 찾아 낼수 없다.

왜 뿌리를 찾아야 하느냐?

찾다 보면 저절로 숭조(崇祖)정신이 생기고

자연스럽게 충과 효를 배우게 된다.

다음엔 국토사랑 정신으로 이어진다.


선조들이 어디 내집 근처에만 파묻혀 있는가?

그분들의 족적을 찾다 보면 전국 도처에 연고없는곳이 없다.

타 지역에 들렸을 때

‘가만있자 여기 내 11대조 할아버지가 묻혀 계시다는데..’

‘여긴 우리 몇대조 할아버지가 귀양 오셨던데 로구나’

하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지역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고

지역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바로 국토 사랑 정신의 근간이 아니겠는가?


그뿐이 아니다. 청소년들이 자칫 나쁜짓의 유혹을 받다가도

‘족보를 보니 나도 뼈대있는 집안이던데 이럴수 없지’

하게되면 그 정서순화에 얼마나 도움이 되겠는가?.


그렇다 .비디오 족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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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문중의 시조에서부터 그 문중의 역사적인 인물들의 묘 영정 제각,

배향된 서원, 기타 그분들과 관련된 자료를 다 모아 가지고 푸로그램을 만들자.

비디오 데크가 있는 집에선 적어도 그 테프 한 개씩은 사갈 것이다.

나는 그것을 '기관차'로 명명 하겠다.

그 기관차를 보고

‘우리집안은 저분부터 시작 됐으니 저분서부터 나 까지 족보를 만들어 주시오’

한다면 그게 바로 돈 받고 푸로그램 제작해주는 용역 사업 아닌가?


1호차 2호차..이런식으로 만들어 기관차에 붙여주기만 하면 돈이 된다”

누구에게 물어봐도 그것은 명분과 타당성을 동시에 지닌 사업이었다.

나는 우선 백문일견(百聞一見), 샘풀 푸로그램이 시급했다.


어느 성씨를 먼저 한다?

가장 인구가 많은 성씨?

역사적으로 가장 추앙받는 인물?

아니야 이왕이면 시기적으로 가장 주목 받는 집안의 족보부터 시작하자.

그게 누구냐?

당시에 국가보위 상임위원장으로있던 전두환(全斗煥)씨의 족보를 영상으로 재현 하는거다.

그의 뿌리는 어디인가?

파보와 세보는 어떻게 흘러 왔나?

그 집안의 명현 영걸들은 누구인가?

지명도나 관심도로 보아서 이보다 더 좋은 모델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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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겁(?) 없이 그 사업에 뛰어 들었다.

 

합천 생가로 달려가 수소문해 봤더니

전 위원장의 삼촌인 전상희(전상희)옹이 초계서원(초계서원)의 전교를 지낸분이었다.

게다가 전두환씨도 타계한 선친을 대신해서

문중의 어른 노릇을 하고있는 이 삼촌을 가장 존경 하고 어려워 한다는 소문이었다.

(됐다. 초계서원 전교를 지내신 분이면 우리의 사업 목적을 이해 하실께다.

이분만 설득하면 된다)


나는 칠순의 노옹을 찾아 갔다.

뜻밖에도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아니 조카분이 이 나라에서 가장 힘있는 자리에 올랐는데

이 뜨거운 뙤약볕 밑에서 일을 하시다니요?”

“그 사람이 어느 자리에 있던 나야 농사꾼 아닌교?”

그 초연함과 검박, 겸손함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집으로 모시고 와서 사업 설명을 하자 보학에 밝은 노옹은 금새 알아 들었다.

“하긴 그 사람도 일찍이 고향을 떠나 객지로 전전 했기 때문에

집안의 내력에 대해서는 잘 모를깁니더.

남의 웃 사람 노릇을 할려면 자기 뿌리도 알아야겠지요

문중에서 알아서 해야할 일인데 그냥 해주신다니 우리가 오히려 고맙지요”


문중의 전폭적인 협조를 받아 우리는 관련 자료들을 모았고

노옹의 둘째 아들인 전문환(全文煥)씨의 안내로

전국에 흩어진 전씨 문중의 선조 묘들을 답사했다.


그러는 동안에 전두환씨가

그해 8월 27일 통일주체국민회의의 간선으로 제11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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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의 주간지인 <주간경향>에선 생가를 화보에 실렸다가

막상 배포 할땐 가위로 오려내는 소동을 벌였고

역시 생가와 선친묘를 찍기위해 내려온 MBC-TV의 촬영팀이

합천 경찰서장의 제지를 받고 그대로 되돌아온 사건도 있었지만

우리는 아무런 제지 없이 의기양양(?)하게 촬영을 진행 시킬수 있었다.


촬영팀이 녹화해온 테프를 점검 하면서 내가 놀란 것은

전씨 문중의 놀라운 숭조 정신이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경희대학 옆에 있는 시조묘(환성군 전섭)는 단소였고

실묘는 강원도 정선군에 있는 8세손 전선(全愃 정선군)부터인데

30세 완산 전씨의 중시조 (全集 忠정공)를 거쳐 52세손인 전두환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단 한기의 묘도 실전된바 없고

묘 마다 비석이 아니면 표석이라도 꼭 있었다.


생각 해 보라.

백제인이었던 8세손 전선이

신라에와 벼슬을 한 것은 내물왕 즉위년이니 373년이었다.

그로부터 1600여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전두환 대통령에 이르는 직계의 묘소들이 단 한기도 실전된바 없다는 것은

그 집안이 얼마나 선대들의 묘를 잘 가꾸어 왔는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사실이 아닐수가 없다.


"조상들을 저렇게 위했으니 대통령이 나오지"

제작진들도 부러움 반 찬탄 반이었다.

마침내 푸로그램이 완성 되어 전상희 옹과 문중 인사들을 초대하여 시사회를 가졌다.

대통령 취임식 장면으로 시작해서 시조묘의 성대한 시향(時享)장면으로 대미를 삼았는데

제작기술이 발달된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가히 원시적이었지만

그 당시엔 그런대로 호평을 받았고 문중에서도 만족해 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 오는날

몇부를 복사하여 전상희 옹에게 전했고

청와대에 있는 기종이 뭔지를 몰라서

각각 VHF 방식과 베타 방식으로 복사된 두 개의 테입을 들고

내가 직접 관련 비서실로 찾아 갔다.


대통령께 증정 하는것이라고 하면서

샘풀로 제작 한것이기 때문에 방문객에게 공개 하는 것을 양해해 달라고 부탁 했다.

며칠후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뜻밖에도 공개불가였다.


아니 대통령의 행적을 담거나 비판한 푸로그램도 아니고

선조들의 위업을 세계순으로 기록한 푸로그램인데

무엇 때문에 공개 불가냐고 항의를 했으나 관계관은 요지부동이었다.


“어디가 잘못 됐습니까? 고쳐야 할 장면이 있다면 고치겠습니다”

“하여튼 검토중이니 기다리세요 그동안 일체 공개 하면 안됩니다”

가족들 편에 보낸것도 있고 해서 며칠 기다려볼 심산이었는데

다음날 관활서에서 형사들이 몰려 나왔다.

푸로그램을 제작한 동기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 묻더니

역시 상부의 지시가 있을때까지 일체 공개 해선 안된다고 엄포를 놓고 갔다.


각 문중의 종친회 관련 인사들을 초청하여 공개 시사회를 갖고

또 몇몇 투자가들에게 ‘비디오 족보 시대’의 가능성을 제시하여

회사의 열악한 재정 문제까지 타개 하겠다는 생각으로

대대적인 이벤트를 기획하고 있었는데 그조차 무산되어 버리니 기가 막혔다.


더욱 기가 막힌 것은

그동안 무리하게 투자한 제작비와 고가의 장비들을 보완 하느라고

여기 저기 돈을 끌어다 썼는데 싻수가 노랗게 보였던지 빚 독촉이 자심해졌다.


청와대에서는 여전히 반응이 없었고

문중에서도 ‘전해 주긴 했는데...’하면서 말 꼬리를 흘려 버리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제작비를 청구한것도 아니고 샘풀 푸로로 내부에서만 활용하겠다는 것인데

어디서부터 꼬이기 시작 한 건지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좀 기다려 보자‘던 전상희 옹마져 타계해 버렸으니

서슬 푸른 권좌에다 대고 따질수도 없고

촬영 당시의 그 기고만장했던 사내의 공기는 이내 의기소침과 체념으로 뒤바뀌여 버렸다.


구걸 하듯이 돌아 다니며

홍보물 용역 수주로 회사의 명맥은 근근히 유지를 해왔지만

그 수입으로는 이잣돈 갚기에도 힘든 처지였고

신형의 기자재로 무장한 후발 업체들이 속속 탄생 하면서

이제는 장비 싸움에서 또 밀려 날수밖에 없었다.


회사가 갈아 앉을 기미를 보일때는 차라리 갈아 앉게 내 버려 두는 것도

손해를 최소화 할 수 있는 현명한 방법이란것을 나는 한참 후에서야 터득했다.

바닥까지 갈아 앉아 버리면 더 이상 갈아 앉을데가 없으니

떠 오르는 방법만을 모색해하면 될게 아닌가?


갈아 앉지 않을려고 발버둥을 치다보니 오히려 빚덤이만 늘어 갔다.

결국 나는 ‘비디오 단군’이요

‘이 땅의 흑백 TV 시대에 칼라로 푸로그램을 만든 첫 번째 사람’이라는

빚 좋은 개살구 역할을 끝으로

자본금의 2천배가 넘는 부채와 함께 창업 3년만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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