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청 앞에
<수향>이란 이층 다방이 있다.
50가까운 주인 여자가 손님을 맞았다.
“혹시 정도전이라구 알아요?”
“아 정도전씨요? 그러문요 알죠”
역사적인 인물에 대해서 “씨”자를 붙이는게 생경하게 들렸다.
(혹시 이 여자가 민원실이나 또는 다른 부서에 근무하는 동명이인의 인물을 착각하는것은 아닐까?)
해서 슬그머니 장난끼가 돋았다.
“요즘도 여기 자주 와요?“
“어머머 조선왕조의 개국 공신 얘기 하는거 아니에요? 그분 집터가 종로구청이잖아요?”
뒤통수를 얻어 맞은것은 바로 나였다.
종로구청 앞엔 <정도전의 옛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그 앞에서 20년씩이나 다방을 운영 해 왔다니 어찌 모르고 있겠는가?.
다방을 나서서 나는 다시 종로구청앞에 섰다.
한국통신에서 시작하여 종로구청을 지나 공평동으로 이어는 이 길이 <삼봉길>인걸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어지럽게 널려진 전선줄 밑에서 <삼봉길>의 이정표가 올스년스럽기만 하다.
정도전의 집은 현재의 종로구 수송동 146번지 일대다.
종로구청이 안채자리라면 수송초등학교 터가 서당터이며
한때 경찰 기동대가 있던곳이 가마와 마필을 보관하던 마궐터이다.
그러구보면 집이 엄청 컸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도대체 몇평이나 됐을까?
(5천평? 만평?)
그러다가 나는 실없은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집 한 채도 없이 전세방으로 전전 하던 젊은 시절에 나에겐 꿈이 있었다.
이 담에 늙어 고향에 돌아가면 내 땅에다가 번듯하게 집을 짓고 사는 꿈이었다.
친구들이 소문을 듣고 물을것이다.
“건평이 얼마나 돼?”
나는 가장 겸손한척 목소리를 낮출것이다.
“얼마 안돼 한 스물 댓평....”
친구놈이 그러면 그렇겠지 하면서 시큰둥하게 물을 것이다.
“대지는 몇평이구?”
그럴때 나는 정말 별거 아니란 듯이 애써 내뱉듯이 대답할것이다.
“대지? 한 만평 돼”
“뭐 마.만평?”
숨이 찬 친구놈 앞에서 나는 한껏 느긋해 할것이다.
그땐 정말 시골에 만평에서 200평 빠지는 땅이 있었다.
애당초 집안 어른의 산인데 먹고 살기가 고달프니 도아달라고 해서
당시엔 쓸모없는 땅이지만 내 조부께서 쌀 세가마를 주고 샀다고 한다.
산도 아니요 들도 아니라고 해서 <토림>으로 등재된 땅이었고
나는 노후의 꿈을 거기다가 두고 있었다.
그런데 집안 동생이 그 땅을 팔아 먹었다
조부께서는 어쩌다 명의 이전을 못하셨고 종계 장부에만 기재해 놨던것이다.
평생 객지로만 떠 돌아 다니셨던 내 아버지도 명의 이전엔 관심이 없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긴 집안에선 다 아는 사실이었고
그 땅을 팔아 먹은 동생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땅이 넘어 가리라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문제는 부동산 중개업자였다
중개업자는 내 집안 동생을 찾아와 아직도 그 할아버지 명의로 돼있음을 상기 시키고
상속을 받아서 팔라고 제의를 했다.
동생은 며칠밤을 번민 했을것이다.
워낙 살기가 어려웠던 동생인지라 끝내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그 땅을 팔아 치웠다.
내가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또 몇 년후,
고래등같은 공장이 그 땅에 들어선 다음이었다.
처음엔 그 동생이 괘씸했고
소송이라도 걸어서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땅을 팔아 먹고 그 죄책감 때문에
고향과는 아예 등을 지고 사는 동생에 대한 연민도 연민이려니와
집안끼리 송사에 휘말렸다는 얘기도 듣기 싫었고
무엇보다도 내 스스로의 잘못이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타계하신지 벌써 몇 년인가?
그동안 나는 고향에 대해서 너무나 무심했고 그 벌을 이제 받는다고 생각 한것이다.
정도전의 거대한 집터를 두고 왜 새삼스러히 옛날 일이 떠오르는지....
다시 얘기의 본줄기를 찾아 가자.
정도전, 본관 봉화(奉化)이며 자는 종지(宗之). 호를 삼봉(三峰)이라고 했다.
그는 조선왕조 개국의 창안자요 실천가였고 개혁의 선봉장이었다.
경복궁을 비롯해서 4대문과 4소문, 태평로 종로등 도심의 설계는 물론
그 안의 동네 이름이 다 그의 손으로 만들어졌다.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찬진하여 법제의 기본을 이룩하게 하고
1395년 정총(鄭摠) 등과 《고려사》 37권을 찬진했으며,
1397년 열강들 사이의 일시적 권력공백을 이용해 만주 수복을 도모하기 위하여
동북면도선무순찰사(都宣撫巡察使)가 되어 성을 수축하고 역참(驛站)을 신설했다.
척불숭유를 국시로 삼게한 유학의 대가였으며
외교 ·행정 ·역사 ·성리학 등 여러 방면에서 막힌바가 없었다.
선비인가 하면 군사 지휘자였고 학자인가 하면 야심만만한 전략가였다.
<삼봉이 아니었으면 내가 어찌 오늘의 이 자리에 있을수 있겠는가?>
술에 취할때마다 이성계는 이렇게 얘기를 했고
<유방이 한나라를 세운것이 아니라 장량이 한나라를 세운것입니다>
역시 술에 취하여 이렇게 응수 할수 있었던 정도전.
그랬다
정도전이 있었기에 이성계는 조선을 창업할수 있었고
이성계가 있었기에 정도전은
고조선 이래 왕권 중심의 군주제를 폐지하고
오늘날의 내각 책임제에 버금갈 <재상의 나라>를 꿈 꿀수가 있었다.
인군이 재상을 임용하고
인재의 등용과 퇴출은 그 재상에게 맡겨 정사를 돌보게 하면
한 가계에서 대를 잇게 되는 인군이
설사 현명치 못해도 국가의 위기를 관리하고 태평한 시대를 이어갈수 있다는
<신권의 중심의 나라>를 만들자는것이 바로 정도전의 이상이요 발상이었다.
그러나 불과 6년이었다.
<어렵게 세운 나라는 재상의 나라가 아니라 강력한 지도자가 이끌어 가야 한다>는
<왕권정치>의 의지를 내세운 이방원에 의해서 그의 꿈은 6년만에 허망하게 끌어 내려졌다.
그것뿐인가?
훈 일등의 개국공신이 조선의 역사에서 500년 동안이나 대 역적으로 기록되어졌다.
삼봉길을 더듬어 올라온 나는 한국일보사 앞에서 잠시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앞에 있는 이 길이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송현마루겠고
건너편, 미 대사관 직원들이 거주하는곳이 의성군 남은의 애첩 집이었을것이다.
그날밤에 과연 여기서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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