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말인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명치유신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라면 농담이라고 일소하고 말겠지만 대부분은 긴가민가 할 것이다. 그만큼 우리들은 명치유신에 대해 잘 모른다. 아니 나와 같이 제3공화국의 10월 유신시절을 직접 겪었던 세대들은 명치유신에 대해 분명 많은 오해들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왜냐면 중 고등학교 때 범생이었다고 자부하는 필자가 그렇게 오해를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 동안 필자가 알고 있었던 명치유신은 이렇다.
19세기 후반기에 메이지(명치)천황이 시대의 변화를 인식하고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막부 정치체제를 종식시키고 서양의 입헌군주제와 3권 분립 사법체제를 도입하여 정치,경제,사회,국방 모든 면에서 일본을 일거에 근대화시킨다. 이후 일본은 급속히 산업을 일으키고 국방력을 키워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하여 한반도를 병탄하고 나아가 태평양전쟁까지 일으키는 강국이 된다. 반면 그 시대 조선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우물안 개구리가 되었으며 동학란조차도 자체 힘으로 진압하지 못해 일본과 청나라 군대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일본의 지배를 초래하는 못난 역사를 만든다. 대충 이렇다. 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인식은 이와 별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인식에는 상당한 오해가 있었음을 최근에 알게 되었다. 이런 오해들을 나열해 보자.
첯째, 조선의 지도자인 대원군은 시대흐름을 파악하지 못하고 쇄국정책을 펴서 망국의 길로 갔고 일본의 지도자인 메이지 천황은 개국을 하고 서양문물과 제도를 도입해서 한반도를 지배하는 제국이 되었다는 인식이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폈고 일본에 먹혔다는 것은 오해의 소지가 없다. 요는 메이지 천황이 친위 구데타를 일으켰다는 인식이 잘 못 되었다는 것이다. 메이지 천황이 구데타를 일으킨게 아니고 막부의 마지막 쇼군(將軍)인 도쿠카와 요시노부가 스스로 정권을 천황에 내 놓은 것이다. 스스로 왕(천황은 상징적 존재였고 실질적 국가수반은 막부 쇼군) 못해 먹겠다고 정권을 내 놓고 물러 났는데 형식은 천황에 정권을 되돌려 준다는 형식을 띤다. 소위 대정봉환(大政奉還,1867년)이다.
둘째, 메이지 천황이 현명하여 세계사의 조류를 읽고 근대 국가 체계인 입헌군주제이면서 3권분립의 공화정을 도입했다는 인식이다.
공화정을 도입한 것은 맞는데 세계사의 조류를 깨달은 것은 아니다. 원래 일본의 천황은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그래서 정치 경험과 노하우가 원래부터 없어서 스스로 군주가 되어 막부가 내 놓은 통치권을 행사할 수 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다시 쇼군을 임명할 수도 없고, 스스로 왕이 될 수도 없고 하여 별 수 없이 왕이 없는 공화정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런 공화정을 도입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카모토료마, 이또히로부미, 후지카와유키치 같이 서양문물과 서양정치체제를 연구하고 체험한 사람들이 강력 주장하였기에 가능한 것이지만 말이다.
셋째, 메이지유신도 10월유신 같이 Top – down 형식이었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우리는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을 겪었기에 메이지유신도 메이지 천황이 주도한 것으로 잘 못 인식하고 있다. 실제로는 메이지천황은 교토의 황궁에 가만히 있었고 남쪽 끝의 사쓰마번(薩摩藩, 현 가고시마)과 서쪽 끝에 있는 죠수번(長州藩, 현 야마구치) 출신의 무사와 낭인 들이 주축이 되어 친 막부세력을 무력으로 몰아낸 Bottom – up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반란으로 시작된 일종의 혁명이다.
넷째, 메이지유신도 10월 유신같이 처음부터 이러이러한 방향을 정하고 지금부터 이런 개혁을 한다하고 시작하였을 것이란 인식이다.
10월 유신은 그랬지만 메이지 유신을 아니다. 메이지유신은 처음부터 개혁을 이리이리 하자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고, 정치경제적인 이해관계로 개항에 반대하는 사쓰마번과 죠슈번이 동맹을 맺고 개항에 찬성하는 막부에 대항하면서 시작된다. 사쓰마 죠수는 일찍부터 외국과의 무역이 발달하였다. 나가사키에 네델란드 등 외국 상인들의 거주지가 이미 있었으며 동남아, 서양과의 활발한 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이런 무역의 이권을 알게 된 막부가 개항이라는 합법적인 조약을 통해 무역을 독점하고자 한다. 그런 이해 관계로 사쓰마, 조슈와 막부가 대립하게 된다. 그 진행과정에서 막부의 정책을 대놓고 반대하면 반란이 되어 막부군에 토벌의 명분을 주게 됨에 따라, 사쓰마,죠수는 다른 대의명분을 도입하게 되는데 소위 존왕양이(尊王攘夷)다. 막부가 개항으로 외국군대를 끌어들여 천황을 위해 하려 하기 때문에 개항하면 안된다는 논리다. 개항 반대를 위해 천황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결국 막부군의 토벌이 시작되었는데 죠수 단독으로 대항하여 패하였던 1차 토벌과는 달리 죠수는 사쓰마와 연합하여 막부의 2차 토벌에 승리한다. 원래 사쓰마와 조슈는 견원지간이었으나 그 유명한 사카모토료마가 막후 공작하여 이 사조동맹을 이끌어 냄으로써 유신이라는 새역사의 시발을 만든 것이다. 결과 막부는 세력이 급속 와해되어 더 이상 막부정체체제를 운영하기가 어렵게 되었고 요시노부가 타협안을 만들어 정권을 내 놓게 된 것이다.
다섯째, 메이지 천황이 직접 주도 한 친위 유신이었으니 별다른 저항이 없이 순조로이 진행되었을 것이라는 인식이다.
아니다. 1차 죠슈토벌, 2차 사쓰마,죠슈 토벌전쟁이 있었다. 이후에도 대정봉환 후 실권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 쇼군 요시노부의 추밀원 장악 기도에 반대한 사쓰마,죠슈,도사 연합군과 친막부군간의 보신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에서도 패한 요시노부 쇼군은 완전히 정권에서 떠나려 하였으나 에도(현 됴쿄)를 중심으로 한 잔존 막부세력은 끝까지 저항하여 몇 년 간이나 전쟁이 지속된다.
종합해보면,
메이지유신은 10월 유신같이 메이지천황이 지금부터 이러이러하게 개혁한다 하고 시작한 것이 아니다. 외국의 압력에 밀려 개항하는 과정에서 무역의 이권을 둘러싸고 사쓰마,죠슈 동맹군과 막부군간에 전쟁이 시작되면서 시작된 것이다. 이 전쟁에서 막부군이 패함으로서 막부는 정권을 스스로 천황에 반납하게 되는데 이후 통치경험이 없는 천황은 직접통치를 하지 못하고 사쓰마,죠슈,도사번이 주축이 되어 일종의 공화정을 실시하게 된다. 그런 과정에서도 막부 잔존세력과의 전쟁이 몇 년간이나 있었고, 세이난전쟁이라는 반란도 있었다. 또 농민들의 봉기도 많았다. 사정이 이러니 메이지 유신은 시작과 끝이 모호하다. 메이지 유신의 시작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메이지라는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1868년 10월 23일을 시작으로 보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대정봉환과 왕정 복고가 이루어진 1867년 11월 9일이나 왕정 복고 이후에 성립된 메이지 정부의 성립 시기인 1868년 1월 3일을 시작으로 본다. 그러나 실제는 1차 조슈 토벌전이 벌어진 1864년을 시초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메이지 유신이 종료된 시기에 대해서도 주장이 분분하다. 영주들이 자신의 봉토를 반납하고 폐번치현(廢藩置縣)을 시행한 1872년, 세이난 전쟁이 종결된 1877년, 내각 제도가 발족된 1885년, 헌법이 공포된 1889년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이렇다 보니 처음에는 메이지유신이란 말 자체도 없었다. 후세에 이르러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메이지유신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이런 사실들을 알고 난다면 이 글의 제목이 어떻게 해서 나온 것인지 어렴풋이 이해를 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잡혀간 10여 만 명의 조선인이 대부분 이 사쓰마번과 조슈번에 정착하였다고 하면 더 분명해 질 것이다. 메이지유신은 사쓰마,조슈번의 무사와 낭인들에 의해 시작되고 주도되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말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거론해 보자.
첯째, 일본인들은 철저한 상명하복의 의식이 있어 사쓰마,조슈의 무사와 낭인들의 반란은 쉽게 이해되기 어렵다는 점에 대한 것이다. 1천5백 년 전 쇼오토쿠 태자 때부터 일본인들에게는 화(和)가 강조되어서 기존의 질서체제에 웬만해서는 반기를 들지 않는다. 특히 무신정권인 막부체제하에서는 상명하복이 철저하고 명예화 되어있어 반란은 생각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사쓰마,조슈 무사들과 낭인들은 막부에 반기를 든다. 낭인이라는 신분 자체도 반 일본적이다. 낭인이라는 말은 번주의 허락 없이 영지를 떠난 무사들을 말한다. 즉 영주에 반기를 든 사람들이다. 이런 반골기질은 일본인들의 전통적인 기질이 아니다. 반대로 조선인들은 반골기질이 강하다. 원래부터 국난 때엔 의병활동이 생활화 되어 있었으며 게다가 조선시대에는 맹자의 의(義) 사상에 투철하여 옳지 않으면 목숨도 아까워하지 않고 행동했다. 조선인의 피가 섞인 사쓰마, 조슈의 하급무사들이 탈번하여 낭인이 되었으며 이 낭인들이 천황이 있는 교토에 몰려들어 막부의 신센조들과 생사를 걸고 싸움을 하였다고 한다면 훨씬 설득력이 있게 된다.
둘째, 사쓰마 무사들이 용감하고 싸움 잘하기로 일본 내 최고였다는 사실 또한 범상하지가 않다. 원래 일본인은 체격이 왜소 했다. 반면 조선인들은 일본민족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다 할 정도로 장대하였다 한다. 그만큼 체력적으로 우수했다. 그런 조선인의 후예라면 당연히 장건하고 싸움 잘 할 것이다.
1599년 6월 일본에서 송환되어 돌아온 정희득의 상소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조선남자로 일본에 잡혀간 자가 포술과 검술을 익히고, 배 부리는 것이나 달리기도 익혀서, 강장(强壯)하고 용맹하기가 왜인보다 나으니, 비록 조선에서 10년 동안 훈련해도 이러한 정예는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이제 모조리 찾아 모으면 3~4만 명 되고 노인과 어린이 및 여자의 수는 갑절이나 됩니다.’ 라는 내용이다. 왜인보다 강장하고 용맹하다고 하고 있다.
셋째, 사쓰마에 끌려간 조선인들이 대부분 무사가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광해군일기 9년 4월 19일자 기록에 보면 일본으로 납치된 전이생의 서한이 소개되고 있는데, 서한에 따르면 사츠마에 피납 조선인들이 일정지역에 집단적으로 거주하면서 창검술과 진법만을 연마하고 있다는 내용이 나온다. 그 숫자가 무려30,700 명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을 통해 많은 왜군들이 죽었다. 그렇게 일본 내 무사들의 수가 줄어든 상태에서 3만 명은 엄청난 숫자다. 임진왜란에 참전한 사쓰마군은 약 1만이라 한다. 그 중 약 50%가 전사하거나 조선에 귀순하였다고 한다면, 잔존 사쓰마번군은 5천여 명에 불과 한다. 그런데 이 사쓰마에 조선군이 무려 3만 명이나 정착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이후의 사쓰마번 무사들은 대부분이 다 이들 조선군의 후예들이다는 말이 된다. 막부시절의 일본에서는 사,농공상,천민의 신분제도가 엄격하였으며 대대로 세습되었다는 것을 보면 더 그렇다.
넷째, 포로 조선인들이 노예로 전락한 경우도 많았지만 일반 평민의 신분을 회복한 경우도 많았다.
임진왜란 종전 40년 후, 나가사키의 평호정(平戶町)에 대한 일본측 조사서에 보면 주변에 살고 있던 15명의 조선인 1세들의 신분 상태가 나타나 있다. 그들 대부분이 아동기에 납치되었고 여성이 대다수였다. 이들 조선인 15명 중 자가소유 4명, 셋방살이 5명, 고용살이 6명이었다. 즉 15명 중 9명이 노예적 신분을 탈피한 것으로 나타난다.
임진왜란 이후 명치유신까지는 250년의 시간이 흐른다. 1세대를 약 25년으로 보면 무려 10세대가 흘러서 이미 일본인들과 피가 많이 섞였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래도 철저한 세습신분제도를 감안하면 하급무사들에는 조선인의 피가 많이 남아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그렇다. 임진왜란 때 사쓰만 번으로 끌려가 사쓰마군이 된 조선인이 무려 3만 명이나 되었으며 이들이 사쓰마군의 주력이 된다. 이들은 왜인들보다 장건하고 용감하여 싸움을 잘 했으며 이들의 후예가 명치유신 때 사쓰마,조슈 연합군의 주축이 된다. 이들에 의해 명치유신이 시작되었으며 이들이 막부군을 패퇴시키고 유신을 주도 하였다.
이렇게 주장한다면 이제 당신은 이를 그냥 웃어넘기고만 말 수 있을 것인가?
2015. 1. 3. 태 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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