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15대 면면히 이어온 조선의 소박미(완)
이광정 후손 판창가(24)
하기가마 종가 15대 坂倉新兵衛로 통칭되는 사카구라(坂倉正治)씨는 올해 (1992년)43세,1978년에 습명을 받았다 .동경 예대 조각과를 졸럽하고 이 대학의 대학원에서 도예를 전공 했다.현재는 일본 공예회의 정 회원이기도 하다.
“에도 시대만 해도 이곳엔 12채의 가마가 늘어서 있어 그야말로 장관이었던 모양입니다.현재는 네채밖에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규모가 크다는 찬사에 그는 겸허한 어투로 설명을 시작 했다 .
李勺光의 아들인 李光政이 개요를 했고 그대부터 이곳의 산 이름은 고려산(高麗山)으로 불렸다. 3대의 李光俊(平西郞光俊은 아들이 있었지만 능력이 없다해서 제자를 양자로 삼아 대를 물려 주었다.4대인 光新이다.
그런데 5대인 光長때 사건이 발생 했다.가솔(家率)한사람이 번의 무사를 살해한 사건이었다. 이 일로 성을 반납하고 추방을 당했지만 번요 운영에 지장이 생기자 다시 불러들여 성을 바꾸게 했다.6대인 坂倉藤左衛門 이었고 그때부터 이 집안은 坂倉家가 되었다.
그러나 이집안이 초대때의 영광을 되찾은 것은 12대인 新兵衛때였다.명치유신으로 폐번이 되고 자립 경영이 어려워져 모두 폐업을 했지만 12대는 80년 생애를 통 털어 기술을 향상 시키고 판로를 개척 하는일에 전념,마침네 하기야끼의 성가를 높이고 붐을 일게 하는 공을 세웠다.
덕분에 그는 무형문화재로 지정을 받았으며지금도 집앞 계곡에 <하기야끼 중흥조>의 송덕비가 서 있다.
선대가 새로 조성한 기반을 바탕으로 훌륭한 작품을 많이 남긴것은 12대의 아들인 神兵衛宗治였다. 14대라 했다.
“아니, 세계표에 이상이 있는것 아닙니까? 12대의 아들이면 13대가 돼야 하는데...”
필자의 질문에 15대는 미소를 머금고 설명을 계속 했다.
14대는 12대의 3남이었다. 장남이 도업을 계승할것으로 알고 그는 처음부터 다른 길을 택했다. 하기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베(神戶)에 있는 어느 해산물 가게에 취직을 하고 있다가 폐가 나빠 정양겸 고향으로 돌아 왔다.
큰형인 光太郞이 교토(京都)의 도자기 시험장에 유학을 가 있었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가업을 도울수밖에 없었다. 건강이 회복되자 그는 다시 고베의 제과주식회사에 취직을 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징집을 당했단 큰 형이 필리핀에서 전사를 했다. 둘째는 육군장교인 직업 군인이었고 가업을 계승할 사람은 자신밖에 없었다.
“이제 너는 사카쿠라가의 13대로 습명을 해야 한다.운명으로 알고 받아 들여라”
그때까지 생존해 있던 12대의 엄숙한 분부 앞에서 3남인 아들은 머리를 저었다.
“13대는 큰 형님입니다 형제중에서도 습명의 능력과 자질을 갖춘 사람은 큰 형님뿐입니다. 생전에 본인도 그렇게 아셨구요”
“그러나 그앤 죽었어”
“추증을 해 주십시오 큰 형님이 13대로 추증이 된 다음에 제가 14대로 습명을 하겠습니 다”
형을 생각 하는 동생의 마음에 12대는 눈물을 흘렸다.그는 3남의 뜻을 받아 들이기로 하고 그때부터 엄격한 지도를 시작했다. 하기야끼 작가로서 존재한 30년의 시발이었다,
“그 30년은 전반기 15년 후반기 15년으로 나눌수 있습니다 전반기 15년동안은 전통기법의 수련기였죠. 할아버지는 아버지에게 창작의 기회를 주지 않으셨습니다.선대들이 만드신것을 고대로 모방해서 굽도록 하신거죠.흙다지기, 유약의 배합,물레성형,..할아버지의 마음에 들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그 작업을 하셨다고 합니다. 할머니도 대단한 분이셨죠. 다도를 모르면서 도자기를 만들 수 없다면서 쓸어지기 직전까지 노동을 한 아버님을 꿇어 앉혀놓고 늦은 밤과 새벽에 꼭 다도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15년의 각고 끝에 1959년 그는 마이니치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제8회 현대 일본 도예전>에 첫 작품을 출품했다. 입선이었다.그해 열린 <제1회 서일본 공예전>에서도 입선을 했다.그때부터 그는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 했고 그 이듬해 12월, 12대 신병위가 뇌졸중으로 타계했다.
큰형을 13대로 추증하고 그는 14대로 습명을 했다.그후 몇 년동안 그는 각종 도에전에 출품, 명성을 높였다.위암으로 1년 2개월동안 투병한 시기를 제외하고 59세로 타계 할때까지전 생애에 걸쳐 33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일본공예회 정회원, 하기야끼 기능보유자 지정 문화재등 정력적인 작품 활동을 해왔다.
“식사만 끝나면 늘 로구로 앞에 앉아 계셨지요. 평생을 통해서 단 한번도 가족들과 단란한 휴식시간을 갖어 본일이 없으셨습니다.”
부인 千代宜씨의 회상이었다.
그는 선대에서 배운 전통 기법을 바탕으로 새로운 감각의 작품을 만들겠다는 욕구가 누구보다 강했다.캉로 박물관에 가선 12세기의 이란 <흑유 항아리>에 관심이 많았고 태국의 원시 도기인 <치에소마이>의 성형 기법을 배우는 한편 물고기 문양의 화분을 구해가지고 와선 그것을 복제해 보기도 했다.
한국에도 몇 번씩 와서 직접 다완을 제작해 가는둥 그의 평생은 잠시도 도자기를 떠나 본적이 없었다.
그의 많은 작품들은 紀州博物館, 滋賀현립문화관등에 소장되어 있고 1974년 그가 만든 秋八角菊文樣食籠은 동경 국립미술관에 소장 되어 있다.
<국화를 정성껏 조각한 후에 백유를 발라 일종의 상감풍을 이룬 그의 작품들은 다순함과 섬세함,강함과 부드러움,이지와 정감의 불가사의한 밸런스를 보여주고 있다.>
<작품을 만든 흙속에서 만든이의 품격까지 느낄수 있다는것은 거짓말이다. 표면에 걸쳐지는 강한 개성이 작가의 품격을 덮어 숨겨버리기 때문이다. 묘사가 구상적이 되면 될수록 더욱 그런 현상이 빚어지게 마련이다.그러나 그의 국화문양에선 작가의 품격은 물론 그가 다룬 흙까지도 느껴진다.이거야말로 아문나 흉내 낼수 없는 사카구라가의 피와 전통의 무게가 아닐른지....>
전문가들의 이런 비평을 떠 올리며 우리 일행은 15대 사카그라씨의 안내로 주변을 돌아 보았다. 초대의 가마를 비롯해서 묘소, 다실, 신사, 기념비 그리고 초대때부터 있어 왔다는 수령 4백년의 나무등...역사를 간직한 모든 것들이 장엄 하고 정성스럽게 보존 되어 있었다.
“가훈이랄지 이집안의 정신을 요약한다면 어떤것이 될까요?”
15대 사카구라씨는 잡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우리 집안은 400년동안 도공으로만 이어져 왔습니다. 도공은 손으로, 작품으로 얘기하지 입으로 하는게 아니잖습니까? 선조들이 힘들게 살아오는 모습을 대대로 지켜 보았고 그건 을 잊지 않는것이 가훈 아닐까요?”
숙연해자는 일행을 향하여 그는 덧붙여 애길 했다.
“항상 마음에 새기는 정신, 일본은 도자기 기술이 없어 외국에서 명기를 수입해 왔습니다. 우리도 도공들을 데려다가 한번 만들어 보자.그래서 조선의 도공들이 일본엘 왔죠.일본인 들이 조선의 첨단 기술을 훔쳐 온거죠. 하기야끼의 원점은 소박함이고 그 소박함의 고향이 조선이라는거..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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