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 꽃핀 한국 도자기 <23>
(28)고려산기슭에남은 조선식사기가마
우리일행은 12대 사카(坂高麗右衛門)씨로부터 집안내력을 들은 다음 밖으로 나와 초대때의 가마터를 살펴보았다. 1976년에 山口縣의 교육위원회가 발굴조사를 마쳤다는 옛 窯跡址는 함석이 덮인채 그대로 보존이 되어 있었다.
1호에서 5호까지의 이 가마는 전장 28m, 초대 경사가 15도인 조선식의 연방 등요였다. 사진을 찍기위해 잡초로 뒤덮인 그 옆의 작은 동산으로 올라갔다. 급한 경사도를 따라 올라간 동산에서 발에 밟히는 것은 온통 도기파편들이었다.
“초대때부터 가마에서 나온 불량품의 파편들입니다”
12대 사카씨의 설명을 듣고 다시 살펴보았다. 그 동산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거대한 사기무덤이었다.
사기무덤의 정상에 올라 우리 일행은 古窯址를 내려다 보면서 잠시 말을 잊었다. 얼마나 많은 도자기를 구워냈으면 그 불량품들이 쌓여 이처럼 거대한 산을 이루었을까를 생각하면서 저마다 깊은 감회에 잠길 수 밖에 없었다.
<도자기파편 山처럼>
부감으로 내려다보이는 살림집옆에 거대한 은행나무가 한 그루 서있었다.
“저 나무는 수령이 얼마나 되었습니까”
행여 초대와 관계되는 나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던져본 질문이었다.
“글쎄요. 그건 잘 모르겠군요. 아까 들어오셨던 저 집이 70년전에 새로 지은것인데 저 나무의 가지를 쳐 가지고 그 마루를 깔았다고 하더군요.
필자는 사기동산을 내려오면서 새삼 그 나무를 훑어 보았다. 은행나무의 원산지가 중국이고 우리나라와 일본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그러니까 일본에서 은행나무를 봤다는 것이 새삼스러울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 임진왜란때 포로로 잡혀와 망향의 세월을 보내고 있던 당시의 도공들이 고향에서 본것과 똑같은 은행나무를 봤다면 얼마나 반갑고 감개 무량했겠는가.
집 가까이 그 나무를 가꾸면서 망향의 외로움을 달랬을 당시의 도공들 모습이 눈에 보이는듯했다.
“한국에 가보신 일이 있으신지... ”
사카 집안의 가족묘지를 보기 위해 장소를 옮기면서 필자는 12대 사카씨가 순수한 일본인이라는데 한가닥 아쉬움을 느끼면 물어보았다.
대답은 뜻밖이었다.
“물론이죠. 초대의 고향을 찾기 위해서 진주 근처를 돌아본 일이 있습니다”
몇년전에 한국인 도공의 후예들이 단체로 「뿌리찾기」여행을 떠나는데 12대 사카씨도 그 일행에 끼어 지주 진양 일대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초대가 진주성 싸움에서 포로로 잡혀왔다는 한가닥 기록에 의해서였다. 불행히도 그는 진주 근처의 「효자리 마을」이라고만 기억하고 있었다.
당시 인솔자는 도쿄박물관의 부관장인 하야시 박사였는데 효자리 가마에서 출토된 파편이 하기야키의 초대때 가마에서 나온 파편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고증을 했다고 한다.
“처음 갔는데도 그 일대의 산천이 우리 야마구지현과 너무나 비슷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조금도 낯설지가 않았어요. 그리고 산속에 있는 그 효자리 가마터를 찾아갈때 마늘밭 고추밭을 지나서 갔는데 지금 살고있는 이 집에 오는 길과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놀랐습니다”
<地形 비슷한곳 정착>
얼마전에 필자는 일본속의 한민족사 탐방단의 일원으로 나라(奈良)에 갔을때 그 지역이 백재의 고도인 부여와 너무도 닮아 있는데 놀란적이 있다.
고향을 떠나와 이국에서 정착해야 되는 사람들이 맨먼저 찾는곳이 고향과 닮은 땅이었고 그것은 이번에 돌아본 가라쓰(唐津)의 나카사토 집안이나 심수관집안인 나에시로카와(苗代川)에서도 학인된바 있다.
李勺光을 받아들인 모리(毛里輝元)번주는 도자기를 기간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 도공들을 우대했고 이작광에게도 고향과 비슷한 땅을 선택하도록 배려를 해주었을것이다. 우리 일행은 새삼 돌아서서 초대 이작광이 선택한 지형들을 둘러보았다.
이 땅에 정착한 그의 한이 새삼 아프게 가슴에 닿아 왔다. 뒷산 숲속의 작은 공터에 이르자 때마침 뿌리는 빗속에서 옹기종기 모여선 묘비들이 더욱 을씨년스럽고 초라해 보였다.
우리는 그중에서도 가장 우뚝한 묘비앞으로 다가갔다. 당연히 그것이 초대 李敬의 묘소라고 생각을 했는데 바로 12대 사카씨의 장인인 선대의 묘였다.
초대 이경의 묘비는 아주 왜소한 모습으로 그 한옆에 버려진듯 서 있었다. 시조 묘소를 잘 가꾸고 성역화 시키는 우리의 풍습을 떠올리며 필자는 그 초라한 비앞에서 잠시 착잡한 감회에 젖어 들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萩市서쪽 40km지점인 長門市로 향했다. 형인 李勺光이 세상을 떠나자 2세가 李敬과 결별하고 옮겨가서 개요를 했다는 沈川窯를 찾아 보기 위해서였다.
12대 사카씨는 이작광과 이경의 형제설에 대하여 믿을수 없다고 했지만 그의 주장대로 형제가 아니면 어떠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작광은 임진왜란때 이미 이곳에 끌려와 정착을 하고 있었고 이경은 정유재란때 끌려와 합류를 했다는 기록이나 이작광의 동생인 이경을 불러들였다는 기록, 또 이작광이 세상을 떠나자 삼촌인 이경이 그 아들을 양육했다는 기록등은 두 사람이 보통의 관계는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설사 그들이 남남이었다 하더라도 이미 고향에서부터 알고 있던 사이라면 「故鄕難忘」의 同病相憐으로해서 형제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을 할수가 있다.
문제는 형인 이작광의 후손들도 12대 사카씨와 같은 의견인지 그것이 궁금했다. 또 하나 필자에게 강한 의문으로 남는것은 이작광의 2세가 아버지가 맨처음 개설한 萩窯에서 습명을 하지 않고 1백리밖의 長門市로 옮겨간 진정한 동기가 뭔가 하는데 있었다.
물론 번주의 명령이었다고 하지만 그 자리를 장조카에게 맡기고 이경이 옮겨가는 것이 순리이고 이경이 강하게 그것을 청원했다면 도공들을 정책적으로 우대해온 번주 역시 허락을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長門市를 지나 沈川窯가 가까워지면서 필자는 이상하게 마음이 초조해졌다. 아리타에서 만난 李參平의 후손이나 가고시마에서 만난 朴平意의 후손처럼 선대의 영광은 있지만 현실적으로 빛을 보지 못하는 또 하나의 후손을 만날것 같은 예감 때문이었다.
<한국에도 없는 完形>
그러나 정착 沈川窯 입구에 이르는 순간 필자는 그것이 잠시 동안의 기우였던 것임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산기슭 계곡을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沈川窯의 공방 전경이 우선 일행을 압도했다. 그동안 일본에서 돌아본 어떤 가마와도 비교가 안되는 모습이었다.
안내를 맡은 정경순양이 주인을 찾아 사무실로 간뒤에 우리 일행은 장작이 산더미처럼 쌓인 마당에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았다.
窯祖新兵衛光政社라고 쓰여진 石碑가 눈에 띄었다. 李勺光의 아들인 光政을 모신 坂倉家의 表門이었다. 우리식으로 보면 신사였다.
“아니 이 산 이름이 고려산이네... ”
역시 석비에 새겨진 「高麗山」의 커다란 글자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니 저건 옛날 가마 아닙니까?”
골방의 추녀 사이로 옛모습을 간직한 거대한 등요가 눈에 띄었고 尹龍二교수가 이미 그 쪽으로 뛰어올라갔다.
「朝鮮時代 沙器가마 日서 발견」...
「國內에 없는 完形, 분청자기片 用具도 함께」
지난 1992년 2월, 이런 제목하에 최해국 특파원의 기사로 서울신문 1면 톱에 보도된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국내엔 그 흔적 조차도 남아 있지 않은 16세기 조선시대의 전통형식의 사기가마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하기야키의 宗家가 아니라 일본속의 한국도자기종가에 온듯한 흥분을 느끼며 우리 일행은 주인이 기다리고 있는 도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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