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꽃핀 한국 도자기

(25)한국식쌍분에 묻힌임란포로의 한

첫날 2013. 3. 8. 10:52

일본서 꽃핀 한국 도자기 <20>

 

(25)한국식 쌍분에 묻힌 임란포로의 한

 

 

  우리 서울신문사 학술조사단 일행은 초대 八山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서 밖으로 나왔다. 집뒤에 바로 한국식의 登窯가 있었고 그 옆의 작은 돌담길을 2백m쯤 올라갔다. 파란 잔디위에 原初의 해맑은 햇살이 쏟아지는 숲속의 빈터가 시야로 들어왔다.

 

 

 

  우리 일행은 모두가 감전이라도 된듯 그 자리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저마다 “아!”하는 탄성을 토해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로 그곳에 초대 팔산 내외분의 산소가 있었는데 그게 여태까지 보아온 일본식의 묘소가 아니라 보라 순수한 한국식의 雙墳이었다.

 

 

 

 

 숨막히는 감동의 한순간을 보내고 일행은 그 무덤에 두번 절하고 꿇어앉았다. 4백년의 저편, 임진왜란의 아비규환속에 잡혀와 끝내는 일본땅에 묻히지 않을 수 없었던 초대 八山, 즉 高取八藏重貞이라는 인물이 지녔던 望鄕의 恨을 우리는 이렇게 조우했던 것이었다.

 

<옆에는 세이잔 묘소>

 

  雙墳의 왼쪽엔 1983년 10월 5일 뇌출혈로 사망한 12대 팔산의 어머니이자 팔산가문의 中興祖가 되는 다카토리 세이잔(高取靜山)여사의 묘소가 있어 더욱 感慨가 무량했다.

 

 

 

  참배를 마친 일행은 그 햇빛 쏟아지는 잔디밭에 앉아 12대 팔산으로부터 이 분묘에 얽힌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초대 할아버지께서 유언을 하신건지 아니면 후손들이 할아버지의 한을 생각해서인지 확실친 않지만 묘소는 처음부터 조선식이었다고 합니다”

  원래의 묘소는 福岡縣 飯塚市의 白旗山기슭에 있었다고 했다. 시에선 그 지역에 공영주택을 짓기위해 묘소철거를 요청했다. 세이잔여사는 초대 팔산이 다카토리 가문만이 아니라 일본 도예의 상징이나 다름이 없는 인물임을 내세워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그러나 결국은 移葬을 하지 않을수가 없는 처지에 놓였다.

 

<물방아로 胎土빻아?

 

  초대 팔산의 묘소에 첫삽을 댄 것은 그의 死後 3백70여년만인 1966년 11월의 일이었다. 세이잔여사는 행여 그 속에 초대 팔산의 작품이 부장품으로 묻혀 있을 것을 생각해 인부들에게 각별히 조심을 시켰지만 끝내 몰지각한 인부들에 의해 첫번째로 발견한 도자기가 깨져버리는 수난을 겪었다.

 

 “11cm쯤 되는 호리병이었죠. 제 생전에 어머님이 그토록 화를 내시는 모습을 처음 봤습니다”

  그후부턴 조심을 했지만 이미 깨져 버린게 대부분이었다. 다행이 2대 八良右衛門貞淸이 만든 도자기 1점을 포함해서 모두 3점의 완제품을 거두었다.

 

  관이 마지막으로 나왔다. 관은 이미 썩어버렸지만 관위에 덮인 백회로해서 그 형태는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세이잔여사의 아들인 12대 八山이 무릎을 꿇고 앉은 앞에서 조심스럽게 관뚜껑이 벗겨졌다.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그들의 눈에 먼저 뜨인것은 두개의 밑에 놓여있는 가지런한 치아와 회색빛의 흙으로 뒤덮인 몸 형태였다.

 

  조심스럽게 그 회색빛 흙을 걷어내자 모든 뼈들이 말짱하게 제자리에 있었다.

  “어머님은 갑자기 눈물을 쏟으시면서 중얼거리셨습니다. 팔산 할아버지. 이제 할아버지의 후손들이 보여 살고 있는 小石原으로 돌아가시는 겁니다. 제가 이보다 더 좋은 조선식묘를 만들어 영원히 편안한 잠을 주무시도록 해드리겠습니다”

당시를 회상하는듯 12대 팔산의 눈이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다.

 

 

 

  세이잔 모자는 준비해간 백지에 뼈들을 조심스럽게 옮겨담아 근처 절에 맡겨놓고 조선식 분묘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을 찾기 위해 수소문을 했다. 그리하여 東京대학에서 동양사를 강의하는 교수를 알게 되었다. 그의 조언인즉 “방향이 남향이어야 하고 배후의 산이 반월형으로 둘러싸여져야 하며 묘소앞엔 깨끗한 물이 동에서 남으로 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小石原 일대를 뒤졌지만 그런 吉地는 쉽게 나서질 않았다.

  “한국속담 그래도 등잔밑이 어두웠던 거죠. 만족하진 않지만 바로 집 뒤의 이곳에서 비슷한 조건을 발견해낸겁니다”

  문외한인 필자의 눈에도 아닌게 아니라 그자리는 風水는 바람과 물과 햇볕이 조화를 이루어 明堂자리로 여겨졌다.

“정말 조경도 일품입니다”

 바람막이 심어놓은 은행나무들을 보면서 감탄을 했더니 12대 팔산이 웃으면서 대답을 했다.

“초대께서는 黑田長政에서 잡혀와 그 뛰어난 기술로 해서 그 사람의 비호를 받으셨죠. 恩怨이 함께 얽힌 사이라고 할까요... 이장을 마치고 절에서 법요식을 가졌는데 뜻밖에도 黑田家의 堂主께서 오셨더군요. 산소근처의 조경을 하는데 보태라면서 금일봉을 내놓으시는 겁니다”

  세이잔여사는 사양하지 않고 그 돈을 받아 산소 주변을 정화하는데 썼다.  그렇다고 해서 초대 팔산의 한일 풀리는건 아니겠지만 할아버지의 혼을 만분의 일이나마 위로하는데는 뜻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무덤에서 내려오는 소로에는 꽃향기가 가득했다. 자그마한 개울 건너편에는 물방아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한국에서도 자취를 감추어가는 물방아를 이 먼 타국땅에서 보는 감회는 특별했다.

“아름다운 풍경이군요. 뭘 빻는 겁니까?”

“도자기에 쓸 흙을 빻고 있지요”

 

 

 

 

이렇게 물방아로 흙을 빻아 도토로 쓰려면 한 두달은 족히 걸린다고 했다. 전기를 사용하면 하루에 끝날 일인데, 왜 저렇게 시간 낭비를 하느냐고 묻자 그는 정색을 하고 대답했다.

 

<작품 故國전시 계획>

 

“양식으로 기른 물고기와 자연그대로의 물고기는 그 맛이 다릅니다. 똑같은 이치지요. 전기를 사용해서 만든 흙은 그 품격 자체가 저 흙과는 다릅니다. 몇번이나 시험해 봤지만 신기하리만큼 달라요. 편리한것 보다는 오래되면서도 그윽한 것, 그게 도자기 아닐까 합니다”

우리 일행은 새삼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다카토리 세이잔여사가 처음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7년의 일이다.

  당시 한국언론의 동경특파원 보도가 있고부터인데 그 장본인은 바로 전 문공장관 이원홍씨였다. 그는 초대 八山의 무덤인 그 조선식 봉분과 현재 다카토리 세이잔여사에 이르는 팔산가의 사연들을 기사화했던 것이다.

 

  기사가 나가자마자 세이잔여사는 백여통이 넘는 편지를 받았다. 편지의 내용들은 한결같았다.

  "일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은 갖은 어려움속에서 자신들이 한국인이라는 사실조차 떳떳이 밝히지 못하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한국인의 후손임을 당당하게 밝히고 또한 선조들의 뜻을 기리고 받드는데 최선을 다하여 오늘의 팔산가를 이룩한 여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는 감격의 사연들을 담고 있었다.

 

  이때부터 세이잔여사는 비록 구체적인 계획이 아닌 막연한 바램을 갖기 시작했다. 언젠가는 초대 팔산의 조국땅에서 자신의 작품 전시회를 열리라는 생각이었다.

  그런 바람을 가지고 더욱 더 작품제작에 열을 올렸다. “한국에서 뺏어온것은 한국에 되돌려 보내야 한다”는 열정은 그녀의 마지막 여생을 훌륭히 장식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