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반세기
‘위나 아래나 어쩌면 그리 똑 같냐?’
윤 혁 민
<어느날 신상옥 최은희씨가 이상한 얘기를 했다. 휴전 협정 체결직전, 북에서 고급 장교가 투항해 왔는데 여자 사진을 보이면서 자기 처라고 했다. 정보를 캐내려 하니 여자를 찾아 주지 않으면 못 대겠다고 했단다. 그를 잡은 중대장이 사진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자기 처였다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그 뒷얘기는 하나도 없어요”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요?”
“좁은 땅 아닙니까? 있을수도 있지요”
“난 흥미 없읍니다”
그 뒤 잊어버리고 있었다. KBS에서 10월 푸로그램을 써달라고 했다. 뭘 쓰나 하다가 신감독 이야기가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창작으로 할수밖에 없었다. 제목은 ‘남과 북’이다)
한운사씨가 쓴 ‘구름의 역사’에 나오는 얘기다.
그 프로그램을 내가 맡았다.
아직 PD란 말이 없었을때 내가 PD가 된셈이다.
그때 하는 일은 작가에게 받은 원고를 읽고 줄거리를 첨부해서 결재를 올리는 일이었다. 그리고 결재를 받으면 연출계에 넘겨주는 일이 전부였으니 PD라기 보다는 원고 담당자란 말이 맞을 것이다.
아니 PD와 걸맞는 일이 하나 있기는 있다 그것은 작가가 써온 원고를 최초로 읽을수있는 특권(?)이 주어진 점이라는것이다.
어쨋던 그 푸로그램을 담당 하면서 나는 신이 났다. 첫회부터 요즘말로 대박이 터질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그 예감은 적중했다.
장일구라는 인민군 소좌가 사선을 넘어와서 심문하는 이해로 대위에게 한 장의 사진을 내 놓는다. ‘이 여자는 내 아내다. 이 여자를 찾아주기 전엔 아무 얘기도 안하겠다’ 사진을 들여다보던 이해로 대위가 경악 한다. 그 것은 뜻밖에도 자기 처가 아닌가?
이게 첫회 마지막 씬이었다,
당연히 2.3회 아니 5.6회쯤에서는 그 북한군 소좌가 자기 처를 만날줄 알았는데 1주일이되고 2주일이 되도록 두사람이 만나지지 않는것이다.
그럴지음 나는 <나로 하여금 원고지로 먹고 살게 한 도시>, 청주엘 가게 됐다.
그당시 청주엘 가려면 조치원에서 두칸짜리 기동차를 타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웅성웅성 하더니 앞칸으로 몰려 가는게 아닌가?
무슨 일인가 싶어서 나두 앞칸으로 가 보았다.
승객중의 한사람이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남과 북’의 재방송이 나왔고 그걸 듣기 위해 기동차 한칸이 완전히 비어 버린것이었다.
(우와 정말 인기가 대단 하네)
처음부터 인기가 있다는건 알았지만 그 정도일줄은 몰랐다. 어깨가 우쭐 해졌다.
(제가 그 푸로그램 담당잡니다)
아마 거기서 아는 얼굴이라도 만났다면 틀림없이 이렇게 얘길 했을것이다
방송이 끝나자 사람들은 제각각 자리로 돌아 가면서 한마디씩 했다.
<에이 오늘은 만날줄 알았더니..>
<그러게 말야, 오늘 오늘 한게 벌써 며칠째야?>
질책이 아니라 아쉬움이었다.
한운사씨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이제 그만 두사람이 만나야 되는것 아닙니까?>
했더니 빙긋 웃으시면서 왈.
<작가는 기다릴줄을 알아야 해>
얘기가 나온김에 한운사씨 얘기를 하나만 더 하자.
어느날 집사람이 한운사씨를 한번 만나게 해달라고 졸랐다.
(아하 인기작가를 가까이서 탐색해 보시겠다?)
나는 멋도 모르고 당시 충무로에 있던 세종호텔 건너편의 일식집으로
한운사씨를 초대 했다.
술이 몇순배 돈 뒤에 집사람이 얘길했다.
“사실은 선생님께 부탁 드릴일이 있어서요”
부탁? 나는 긴장 했고 한운사씨도 의아한 얼굴을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집사람은 나의 비리를 하나 하나 고자질을 하기 시작 했다.
나는 당황해서 말리려고 했지만 한운사씨는 그런 나를 손으로 제지한후에
집사람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 주셨다.
그때 집사람의 얘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집 구석에선 봉지쌀을 사먹는지 새끼로 꼬인 연탄을 들고 오는지 가게집에 외상값이 얼마나 밀렸는지 이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저녁마다 술에 떡이 되어 들어 오고 걸핏하면 외박이다. 돈을 갖다 줘야 살것 아니냐? 내가 잔소리를 해봐야 어딧 개가 짖느냐는 식이구 정말 못 살겠다. 생각다 못해 선생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그랬다. 선생님은 이사람을 뽑아 주신분이고 고향 대 선배님이시니 선생님 말씀은 이사람도 어려워 할께다 제발 술좀 작작 먹고 집에 돈좀 갖다 주라고 말씀좀 해 달라>
망신, 이런 망신이 없다 그때 대 한운사 선생은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잠시 침묵, 그러다가 무겁게 입을 여셨다.
“...풀밭에 매여놓은 송아지를 보셨죠? 저 멀리 좋은 풀이 있어도 줄에 얽매어 있기 때문에 그걸 뜯어 먹지 못합니다. 좋은 풀을 놔두고도 영양실조에 걸린다고 할까요? 작가도 마찬가집니다. 이 기회에 아예 고삐를 끊어 놓으시죠. 자유분방하게 돌아 다니면서 먹고 싶은 풀 다 뜯어 먹게요”
그날 나와 함께 2차를 간 아내는 술에 취하여 마구 소리를 질렀다.
“작가란 XX들은 위나 아래나 어쩌면 그리 똑 같냐?”
각설하고
이쯤서 라디오 시대를 건너뛰고 텔레비전 시대로 옮겨 갈려고 했더니 걸리는 사람이 있다.
작가 박수복씨다. 지난달 호(방송문예10월호)에 ‘당시 내가 맡은 푸로는 <양지를 찾아서>...MBC에서 히트를 치고 있는 <절망은 없다>를 흉내 낸 프로그램이었다’라고 썼는데 당시 박수복씨는 MBC 피디로서 그 프로그램의 창안자였다.
나는 박수복씨와 함께 일일극을 세편인가 네편인가를 했다.
첫 번째는 <바바리코트의 사나이>였는데 줄거리가 어떻게 되었는지 기억도 안나고 두 번째는 <이밤에 잠들게 하라>-검둥이 아이를 낳은 미혼모 얘기다.
세 번째가 바로 문제가 된 작품이었다.
당시는 동백림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 할때 였다.
그걸 소재로 <부란덴 부르크의 문>이란 드라마를 썼다.
주제가 녹음 끝내고 첫회분 녹음을 하고 있는데 중정에서 덮쳤다..
대본 몰수,테잎 몰수,
그리고 내가 작사한 주제가 첫 구절 ‘어디서 왔나 어디로 가나 회색빛 하늘아래’ 어쩌구 저쩌구였는데 그게 문제가 됐다.
‘어디서 왔나 어디루 가나’가 뭐냐? 이건 확고한 국가 목표에 대한 도전이다. 뭐? ‘회색빛 하늘 아래?’ 이새끼 이거 회색분자 아냐? 꽝- <방송불가>
그날밤 박수복씨와 난 엄청나게 술을 마셨다.
중정과 방송국이 타협한 결과라면서 동백림을 빼고 완전한 픽션으로 일본을 무대로한 조총련 드라마로 바꾸자고 했을때 난 당연히 안쓴다고 고집을 부렸다.
만취 상태로 서울역으로 나왔다.외로우니까 아버지 생각이 났고 아버지 산소에나 들렸다가 어딘가 떠나고 싶었다.
그때 서울역에선 확성기로 음악을 틀어 주었는데
푸랫홈으로 걸어 나오는 귓가에 흐흐, 느끼는 음악이 들려왔다.
<비창>이었다. 한동안 그 음악을 듣고 있으려니 아닌게 아니라 절망과 비통 그것이었다.
그러다가 오기가 생겼다. 안 쓰는게 장땡이 아니다 그래 펜대 꺾고 먹고 살일도 아득하고 엠병 해달라는대로 다 해주자. 박수복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겠습니다 제목은 <비창>입니다>
그후 박수복씨는 작가로 변신 했다.
KBS-TV에 작품 <소풍>으로 ABU상을 탔고 역시 KBS-TV에 반핵 드라마 <희망>으로 독일에서 주는 FUTRA상을 탔다. 방송가에선 확실한 승산이 안 보이면 절대적으로 작품을 안쓰는 작가, 작가적인 볼테이지가 높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아니 이유황씨 얘길 들으니까 이번에도 작품을 거절 했다면서요?”
“자신이 없어요”
“그러지말고 써달랄 때 쓰세요 아 먹구는 살아야 될것 아뇨?>
“혼자 사는데 돈 들일 있어요? 일년에 단막 한편이면 먹구 살아요"
그것도 벌써 옛날 얘기다.
지금도 가평에서 텃밭은 가꾸며 혼자 산다. 영원한 처녀다.
나보다 대 선배인데도 늘 나더러 선생님이라고 한다.
<박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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