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 이야기

드라마 반세기-방송국 청소부도 부러웠는데

첫날 2012. 10. 15. 08:03

 

<드라마 반세기>

 

방송국 청소부도 부러웠는데....

 

1961년,

516혁명(요즘은 구데타 또는 군사정변으로 불리운다)이 일어 났을때 나는 육군본부 부관감실에서 제대를 기다리는 고참 하사(일반)였다.

 

어느날 문서관리계 담당 계장(육군중령)이 호출을 했다.

<그런줄 몰랐더니 작가구만>

작가? 내가 작가라구?

그런말을 처음 들어보는 나로서는 당황할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물주물 했더니

<지금 당장 가서 이 사람을 만나봐>

손에 들고 있던 쪽지 두장을 나에게 건네 주었다.

하나는 외출증이었고 또 하나엔 <KBS 문예계 원용철>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하! 비로소 짐작이 갔다.

 

1959년말에 KBS에서 처음으로 <신춘 연속극>작품을 공모 했다.

당시 대학을 휴학하고 한 여자의 남편까지 되어 빈둥거리던 나는 여기에 도전해 보겠다고 원고를 썼다. 그때 입대 통지서가 나왔다.몇날을 새우며 입영 전날까지 가까스로 초고를 썼지만 마지막에 등장 인물표는 쓰질 못해서 아내에게 부탁을 했다.

 

1960년 논산 훈련소에서 내 작품이 당선작 없는 입선작 3편중에 한편으로 뽑힌것을 알았다. <내일에의 사랑을>이었다. 소록도를 무대로 펼쳐지는 나환자들의 얘기 였는데 당연히 방송은 불가 였고 나중에 심사위원중의 한분이신 김영수 선생께 들은 얘기인데 나환자가 응모한 작품 같아서 원고지를 넘길때마다 께름직한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후 <소라의 꿈>으로 개작을 해서 방송도 탔고 임희재 각색 강대진 감독으로 영화화 되어 난생 처음으로 삼양동 달 동네에 집도 장만했다.)

 

훈련병 신세였던 나는 시상식에도 참석을 못하고 대신 아내가 참석을 했다.

그리고 턱걸이나마 입선이 됐다는 사실에 고무 되어 나는 군생활 틈틈이 다음 작품을 썼고 1961년에 또 입선을 했다. 당시 당선작은 김기팔씨의 <해바라기 가족>이었고 내 작품은 신부의 아들 얘기를 쓴 <날개를 다오>였다.

두 번째 시상식에서 나는 원용철씨와 인사를 했지만 얼굴도 기억 나지 않았다.

 

어쨌던 남산에 있는 KBS로 원용철씨를 만나러 갔다.

문예계 사무실 앞은 화장실이었다. 긴장했던 나는 화장실로 들어 갔다. 청소부가 청소를 하고 있었다.

(엠병 방송국에 청소부라도 취직이 됐으면 좋겠다)

제대 말년에 한 여자의 남편이자 한 아들의 애비가 된채로 대책이 없었던 나는 그 청소부가 그렇게 부러울수가 없었다.

 

그길로 문예계로 갔더니 원용철씨가 반색을 했다.

<내가 윤혁민씨를 찾느라고 별짓을 다 했소. 나중에 알고보니 본명이 윤병수 더구만. 그걸 알았나? 우선 국장님께 인사부터 합시다>

국장은 윤길구씨였고 그 옆에 육군대령이 한분 계셨다. 방송국에 고문으로 와 있는 김창파 대령이었다.

<잘해보슈 현충일 특집이니까 군인 작가가 어울릴꺼야>

<아직 얘기를 안했습니다>

어리둥절해 있는 나를 보고 원용철씨가 말했다.

<아 그래요? 그럼 가서 얘기를 하슈>

얘긴 즉슨 현충일 특집 드라마를 쓰라는것이었다.

혁명정부하의 방송인데 현역 군인이 쓴 특집드라마라면 의미가 있을것 같아서 전 육군을 뒤져 나를 찾아냈다는 설명이었다. 나로서는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

 

사실을 보고 받은 문서관리계 계장은 특집극을 다 쓸때까지 모든 업무에서 나를 해방 시켜주었다. 지금은 제도가 어떤지 몰라도 당시 육군에서는 사병의 대외 활동은 참모총장의 허가 사항이었다 그래서 특집극 원고도 1차적으로 참모총장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제목은 <새로운 다짐으로 내일을 보라>였다.

당연히 소문에 소문이 이어졌고 방송이 나가자 나는 일약 유명(?)해졌다.

 

다음해 초에 나는 33개월의 군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했다. 제대 하면 꼭 연락하라던 원용철씨 말이 생각 나서 일단 전화를 걸었다.

<아 어디루 연락하면 돼요?>

당시 나는 남가좌동의 모래내 옆에서 셋집을 얻어 살고 있었지만 그 시절 모든 사람이 그랬듯 전화가 없었다. 그래서 다방 전화를 가르쳐 주고 모래내에서 논뚝길을 30분이나 걸어 매일같이 다방으로 출근을 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사흘째가 되면서 회의가 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목 맬때가 아니다. 듣기 좋게 지나 가는 말로 한번 한걸 가지고...

나는 연락을 단념 하면서 막 노동판으로 뛰어 들었다.

 

당시 모래내에서 홍은동 쪽으로 길을 뚫고 있었는데 거기 나가서 리야카로 흙을 나르는 작업이었다. 하루 일당이 쌀 한말 값인 1300환, 리야카 빌리는 값으로 500환을 제외 하니까 800환의 수입이었다.

3일째 되는날 밤에 신촌 다방엘 들렸더니 방송국에서 전화가 빗발 쳤다고 한다.

 

다음날 방송국에 들렸더니 원용철씨가 반색을 하면서 대본을 내 놓았다.

<이걸 한번 써 보슈>

<유쾌한 3형제>라는 대본이었다. 조흔파씨가 쓰다가 사정이 생겨 한주일을 펑크 냈는데 한번 써 보라는것이었다. 얼마전에 새로 시작된 주간극이라는데 라디오가 없던 나는 한번도 들어본적도 없는 대본이었다. 1남 역에 주상현 2남 역에 오승룡 3남 역에 오정한. 아버지 역에 구민 어머니역에 김혜숙.....30분 코믹 드라마로 씨리즈물이었다.

 

이틀만에 써다 주었고 라디오가 없던 나는 신촌 로타리의 전파상 앞을 서성이며 그 방송을 들었다.

그리고 원고료를 찾아 가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조흔파씨가 듣더니 나보다 잘 쓰는군 난 다른것두 있고 바쁘니까 그 작가 계속 씌워’ 하더군요 앞으로는 윤혁민씨 푸로 라고 생각 하고 계속 좀 써주시요>

그래서 1주일에 한번씩 그 작품을 썼다. 당시 고료가 1회분에 2만5천환,

하루 일당 8백환도 감지덕지 했는데 한주일에 쌀 두가마값을 벌다니...

그땐 손님이 없어 빈차로 돌아 다니는 택시들이 부지 기수였다.

(에라 폼 나게 나두 택시를 한번 타보자)

 

남산에서 터억 하니 택시를 집아 타고 신촌와서 내렸다. 밥상 사고 책상 사고 한참 돌아 다니다가 생각하니 결혼식때 해 입은 양복 상의를 택시에다 두고 내린것을 알았다.

그런데도 그게 하나도 아깝지 않았으니 아마 내가 미친놈처럼 흥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하긴 방송국 청소부도 부러웠는데 일약 작가로 방송국엘 드나들게 생겼으니 어련 하겠나...

 

그러든 어느날, 원용철씨가 얘길 꺼냈다.

<윤혁민씨 아예 방송국에 매일 출근 하시지?>

월급은 없고 그 대신 고정 푸로그람을 집필하면서 방송국 일을 돕는 객원 피디였다.객원 피디가 두사람 있었는데 한 사람은 이영신씨였고 또 한사람은 연용모씨였다.이영신씨가 사정에 의하여 그만 두었기 때문에 내가 그 대타로 차출된것이다.

 

평생 처음으로 정시에 출근 하는 사람이 되었고 작가와 피디들 선 후배 동료들과 알게 됐으니 저녁마다 술이었고 퇴근은 거의 통금시간을 지키기에도 벅 찼다.

말이 피디지 작가 한테 원고 받아 결재 받고 연출계에 넘겨주면 끝나는 역할이었고 각자 고정 푸로그램을 맡아 처리 했다..

 

당시 내가 고정적으로 맡은 푸로는 <양지를 찾아서>.....MBC에서 히트를 치고 있는 <절망은 없다>를 흉내낸 푸로그람이었다.

나는 매주 역경을 이기고 성공한 사람들을 찾아 아이스케키통(녹음기)을 메고 전국을 헤멨다. 극본을 쓰고 녹음 내용을 안배하고 연출까지 겸했다.

 

그 와중에도 요즘 말하면 공익 스파트를 매일 10편씩 썼고 구민씨가 출연한 5분짜리 <방송 만필>을 매일 써서 내가 제작하여 방송팀에게 넘겼으니 지금 생각해봐도 일이 많아 행복한 시절이었다.

 

당시 문예계에서 역점을 둔 푸로는 <KBS 무대>와 <단막극장> 그리고 매일 연속극으로 7시 40분의 <라디오극장>과 <연속방송극>이 있었는데 객원피디들(연용모씨 이기명씨 후에 이은성씨 최홍준씨 전홍씨가 합류)이 돌아가면서 푸로그람을 맡았다.

 

그후 KBS-TV가 개국되고 내가 전업 작가로 5년만에 KBS를 떠났지만 평생을 드라마 속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지음 내가 담당한 푸로중에서 기억에 남는것은 한운사씨의 <남과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