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피는 팔도강산
(연출 김수동)
1971년 가을,
문화공보부 차관실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당시 나는 문화영화제작사에서 일하고 있었다.
7년 전에 일본에서 귀국하여 일곱 편의 극영화를 만들었지만,
흥행 성적도 올리지를 못했고, 작품성도 돋보이지를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문화영화 제작으로 연명하고 있었다.
홍경모(洪景模) 차관은
"자네 성격은 영화계에서 적응하긴 힘들께야.
차제에 TV 드라마를 해보는 게 어때?" 하는 것이었다.
홍차관이 주 일본 한국공보관장으로 계실 때
나는 다이에이(大映) 영화사에서 조감독 생활을 하고 있었던 관계로,
공보관에서 제작하는 한국 소개 문화영화 제작시에 조금 도와드린 적이 있었다.
하지만 조감독 생활까지 합쳐서
10년 이상을 공들인 영화에의 미련으로 망설였으나 거듭
"자넨 안정된 기반 위에서 일할 타입이지
영화판처럼 요동치는 데에선 적응하기 힘드니 잘 생각해 보라"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을 고민한 끝에 남산 KBS로 올라가서 최창봉 국장을 뵙게 되었다.
최국장은 "연극계에서는 임영웅(林英雄) 씨가 오니,
각각 영화와 연극 대표로 KBS 드라마에 새 바람을 일으키라우"라고
겁 반 격려 반의 말씀이었다.
TV 부장실에 내려갔더니
뜻밖에도 박종국(朴鐘國) 씨가 앉아 계시지 않은가.
내가 만든 영화가 검열에 걸렸을 때,
허가를 내주지 않은 문공부 영화계장이 바로 박부장이었으니 매우 반가웠다.
[KBS 무대]라는 단막극이 있으니,
당장 해보겠느냐는 박부장 말씀에 매우 당황해서
지금부터 TV 메커니즘을 배워야 되겠으니
3개월 동안 견학을 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한 즉
영화계 사람들은 TV를 우습게 아는데 뜻밖이라면서
간이 신분증을 만들어 주셨다.
그 후 석 달 동안은 부조종실과 스튜디오를 오가면서 살았다.
가장 신기했던 것은 촬영이 끝나서 몇 일 밤을 새우면서
필름 더미를 영화에 비해,
카메라 스윗칭으로 녹화와 편집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과,
훼이드인, 아웃이나 오버랩이 순간적으로 레버를 당기면 된다는 것이었다.
나중에야 안 일이지만
아무 하는 일 없이 매일같이 녹화장에 나타나서 위에서 지켜보고 있는 나를
스태프들이 의식하게 되었고,
아마 정보부 요원일 것이라는 결론까지 내렸었다고 하는 그런 시절의 일이다.
드디어 나도 [KBS 무대]로 데뷔하게 되는데,
말이 데뷔이지 서른 일곱 살의 늦둥이에다가
AD 생활을 겪지 않은 외부 기용,
거기다가 위에서 내려온 낙하산이니 바라보는 시선이 고을 까닭이 없다.
영화 감독 시절에 라디오 드라마를 영화화한 인연으로 알게 된
심영식(沈英植) 씨가 대본을 써 준 [반지]가
나의 TV 첫 작품이다.
빌딩 청소를 업으로 하는 늙은이와 젊은이의
두 청소부가 우연히 화장실에서 반지를 줍게 되어 벌어지는
약간은 교훈적이면서도 따스한 느낌을 주는 그런 내용이었다.
방송이 나간 다음날 출근을 하였더니
이층 계단을 내려오는 최창봉 국장과 마주쳐서 굽신 하는데
"봤어, 좋았어" 하곤 지나쳐 버린다.
멍하니 뒷모습을 보는데 후딱 뒤돌아보고는 엄지손가락을 한 번 치켜세우더니
총총 걸음으로 사라진다.
지금 생각해보면 최창봉 선배의 후배 다루는 보스 기질의 스타일이었는데,
그때는 무거운 짐을 벗어 던진 듯 홀가분하고
가슴속으로부터 행복감이 밀어 올라와서 더 잘해야지 다짐했었다.
AD 생활을 벗어나서 연출자가 된 신출내기 PD에게는
어린이 프로나 코미디 같은
이른바 가벼운 프로그램을 맡기는 것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방송국들의 관례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어린이들과 신뢰 관계를 쌓아올리는
백발의 PD가 외국에는 많고
또 울리는 것보다는 웃기는 일이 훨씬 어렵다는 드라마의 원칙에
비추어 보더라도 의문이 가는 일이다.
내가 처음으로 맡은 연속극은
토요일 저녁에 방송되는 30분짜리 코미디였는데
방송국측의 주문은 억지로 웃기는 쇼를 지양하고
제대로 된 코미디 드라마를 만들라는 것으로서 작가는 윤혁민(尹赫民) 씨,
출연자는 구봉서, 배삼룡, 송해의 트리오에 중견 탤런트를 요소에 배치하여
짜임새 있는 드라마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제목은 “1통 2반 3번지”
문제점은 연습 때부터 극명하게 드러났다.
짤막한 콩트에 익숙한 코미디언들은 스토리를 대충 알고는
특유의 애드리브를 섞어가면서 멋대로 연기를 하고,
연출자는 스포츠 중계하듯 순간 순간을 애드리브로 스윗칭해 온 것이었다.
따라서 작가의 대사는 막 바꾸고, 연출자의 콘티 따위는 개의치도 않는다.
지금 생각해도 살얼음판을 걷는 악몽 같았다.
시골서 올라온 배삼룡 청년이
서울의 구봉서 형님에게 신고를 하는 장면인데
대본에 있는 대사는 서너 마디하고
듣도 보도 못한 수십 마디 대사를 계속 시부렁거리는 것이다.
대본을 서너 장 건너뛰기 일수고,
상대방 대사를 당당하게 내뱉기도 하는데
NG를 낼 수도 없는 것이 배삼룡이라는 캐릭터가 살아 있으니 어쩌랴.
콘티 속에 가두자니
애드리브 명수들의 매력이 없어지고 내버려두자니 드라마가 망하고 진퇴양난이다.
25분 녹화가 되었다는데 대본은 중간도 가지 않았으니 앞이 캄캄했다.
하는 수 없이 대본을 자르고 적당히 고쳐 끝을 맺는 곤욕을 치렀는데,
방송이 나간 후 작가에게 사과하였더니,
윤혁민 씨는 되려 작가에게 맞추면 재미가 없을 수 있으니
출연자에게 끌려가면서 적당히 브레이크를 거는 게 성공의 비결이라고
나를 위로해 주었다.
그런 곡절을 겪으면서도 회를 거듭해가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게 연속 드라마의 묘미인 듯 끝
무렵에는 코미디언들도 녹화 전날에 콘티 대본을 챙기러 나타났고,
나도 "이 대목은 애드리브 하려면 하세요"라며 권하기도 하고
당시로서는 9개월 동안 롱런을 한
행복한 프로그램으로 지금껏 기억에 남아 있다.
어느 날 최창봉 국장이 드라마 제작 직원들을 총집합시켰다.
개구일성
"PD는 왕이야, 프로그램의 전책임자니까.
그러니 뜨거운 열정과 높은 긍지를 가지고 일해야 돼"라고 말했다.
그때 PD들 사이에서는 PD란 POOR DOG의 약자라고 자조하고 있었다.
5년째 일해 온 임시직 AD의 봉급이 8,000원이었으니,
공무원 봉급이 낮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8,000은 교통비 정도에 지나지 않는 액수다.
"어찌 우리가 왕입니꺼.
작가에게 채이고 연기자에게 시달리고
스태프들에게 구박받고, 관리직에겐 짓눌리고,
왕이 아니라 기생입니더. 기생"
이라는 항변이 나오니 최국장은
"너 말 잘했어. 맞아 왕이면서 기생이야. 그게 바로 PD야"
라고 파안대소하더니,
"내년부터는 중앙방송국이 사라지고 방송공사가 된다.
직원들도 공채로 뽑아 우수한 인력이 들어 올 것이니
여러분들도 공부해야 된다",
"공부 잘하고 머리 좋다고 연출 잘한다는 보장이 있나요"
라는 되받음에
"맞아 너 말 잘했어. 머리만 가지곤 안 돼. 끼가 있어야 돼. 끼가.
허지만 방송국의 지적 수준을 높여야 된다는 데 이의가 있나"
라는 대답에 모두들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나라 TV 드라마 제1호 PD인 최창봉 국장의
'PD는 왕이며 기생이다'라는
정의는 PD라는 직업의 특성을 상징하는 표현으로 100% 공감하는 바이며,
나도 자주 사용하였고 또 후배들에게 전수하곤 했다.
1973년 봄에 방송공사로 바뀌고 홍경모 차관이 사장,
최창봉 국장은 부사장, 그리고 신임 TV 국장에 정순일(鄭淳日) 씨가 취임했는데
다음해 봄에 [꽃피는 팔도강산(八道江山)]이 기획되었다.
조국 근대화의 기치 아래 새마을 노래와 잘 살아보세가 울려 퍼지며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었던 시절이다.
방방곡곡을 누비면서 발전하는 모습을 배경에 담고
올스타 캐스트로 일일 연속극을 한다는 기획 의도였다.
제작국 회의에서는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문화공보부에서 '팔도강산'이라는 홍보 영화가 네 편인가 제작된
말하자면 뒷북치는 기획이라는 점,
ENG 같은 카메라가 없는 시절이라 덩치 큰 녹화 차를 끌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매주 스튜디오 녹화를 병행한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어렵다는 점,
그리고 위에서부터 내려온 기획안에 대한 반발도 있고
제작 여건을 무시한 기획으로 규탄되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 된다면서 기획은 강행되었고
작가는 윤혁민 씨가 선정되고
PD로는 가장 강경하게 반대론을 핀 내가 뽑히는 게 아닌가.
나중에 알고 보니
팔도강산에 [꽃피는 팔도강산]으로 제목을 정한 장본인이
문공부 장관이었던 윤주영(尹胄榮) 씨였다니.
이그제크티브 프로듀서는 문공부 장관이고 프로듀서는 최창봉 부사장이고
나는 디렉터인 셈인 것이다.
이미 화살은 시위를 떠났으니 최선을 다하는 도리밖엔 없었다.
윤혁민 씨와는 [1통 2반 3번지]로 호흡을 맞춘 적이 있었고,
집도 삼양동산 중턱의 이웃이어서 협의하는 데 번거로움은 없었다.
홈드라마 터치의 코미디로 설정하고
과감하게 딸만 일곱을 둔 노부부가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자식들 집을
번갈아 가면서 찾아다녀 그때마다 상황이 바뀌고 테마도 바뀌지만
근간은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을 다룬다는 점에 포인트를 두고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봄 프로 개편의 최종 점검이 부사장 주제 하에 열렸는데,
배역의 스케줄에서 세트 디자인, 그리고 야외 녹화의 장소 섭외 등으로
기진맥진해 있던 나는
"어때 자신있어?"라는 물음에
"전혀 자신없습니다"라고 반항하였다.
안색이 확 바뀐 부사장은
공사 출범 때 TBC에서 온 최상현(崔相鉉) 부장에게
어째서 자신없다는 사람에게 프로를 맡겼느냐고 힐난하니
최부장은 영화 출신이라 야외 녹화에 강점이 있고 윤혁민 씨와는 호흡이 잘 맞아
흐뭇한 홈드라마가 되리라고 믿는다고
지금 PD가 피로의 절정에 있어 자신없다고 한 것인즉
너무 걱정마시라고 변호를 했다.
그때 [꽃피는 팔도강산]과 동시에 스타트하는
일일 연속극 [그리워]의 작가 겸 연출자인 이남섭(李南燮) 씨에게도
"어때 자신있어?"라고 물은즉
이남섭 씨는 환하게 웃으며 "잘 돼가고 있습니다, 자신있습니다"
라고 하는 게 아닌가.
부사장은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더니
"어려운 일이 많은 건 알겠는데, 그렇더라도 자신있게 나가야지
뚜껑을 열기도 전에 자신없다고 하니, 그럼 난 어쩌란 말이요"
하며 깊은 눈으로 응시하셨고, 나는 무색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
한참 지나서 나도 관리직에 앉아서 기획 회의를 하다보니
자신없다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후배를 볼 때마다
최창봉 선배와의 한 토막을 떠올리곤 했다.
물론 자신있다고 해서 프로그램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없다고 해서 죽을 쑤는 것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본인이 부인할 때는 앞이 캄캄해질 수밖에….
[꽃피는 팔도강산]은 영화계, 연극계의 연기자들을 대거 출연시킨
초호화 캐스트로 출발하였다.
김희갑, 황정순의 노부부 밑에
큰 딸 내외(최은희, 장민호. KIST의 박사로 전문 분야를 빼면 무능),
둘째 딸 내외(도금봉, 박노식. 유랑극단의 떠돌이로 양자를 키움),
셋째 딸 내외(김용림, 황해. 남매를 둔 목장경영인, 아들애가 백혈병에 걸린다),
넷째 딸 내외(태현실, 박근형. 6ㆍ25전쟁 때 외팔이가 된 퇴역 해병 중위,
아내의 횟집 경영으로 생활 유지),
다섯째 딸 내외(윤소정, 문오장. 포항제철 기사),
여섯째 딸 내외(전양자, 오지명. 울산공단의 맞벌이 부부),
일곱째 딸이 한혜숙으로 대한항공의 스튜어디스,
재벌 승계자로 인생 수업차 신분을 숨기고 속초에서 물지게를 지고 있는
민지환이 그 짝이다.
드라마의 시작은 김희갑 노인이 사위와 딸들 모두를 서울로 불러 올려
가게를 접고 은퇴를 결심 팔도 유람을 다니면서
자식들 집을 번갈아 가며 찾겠노라고 선언하는 장면이
김노인의 한옥에서 펼쳐지는데,
20명 가까운 대가족이 모이니 안방에서 마루까지 펼쳐 놓아도
궁둥이를 부칠 데가 없을 정도로 비좁아서
이러다간 세트가 무너지는 게 아닌가 겁이 날 정도였고
행동선을 긋는 데 무척 고민하였던 기억이 새롭다.
대식구가 한자리에 모인 것은 처음 몇주뿐이고
그 다음부터는 김노인 부부를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그때마다 연기자들과 의논해서
약 2달간을 스케쥴을 비우게 하여 무대를 설정 하였으며
매주 작가와 나는 먼저 출발하여 현지에 도착 취제와
헌팅과 촬영 장소를 물색하고
야외용 대본을 작가가 써 놓고
스튜디오 녹화대본 집필을 위해 상경해버리면
나는 혼자 남아서 콘티를 작성하고
다음날 촬영반이 도착 하면 숨돌릴틈없이 야외 녹화를 강행하고는
서울로 올라와서 편집을 하고 연습을 하고
녹화를 끝내고는 다음날 다음 장소로 떠나는
문자 그대로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일년반이었으나
다행히 녹화차가 양재동 톨게이트에서 노견으로 굴러 떨어져
기제가 손상한 것 빼고는 사고가 없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도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강원도 속초 항을 무대로
부둣가에서 조그만 생선횟집을 꾸려 가는 넷째 딸과
상이군인으로 굴절된 성격을 갖게되는 박근형, 태현실 부부의 애틋한 이야기가
먹혀 들어 초장부터 시청자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윤혁민씨의 필력과 계산의 소산일 것이다.
그때부터 드라마의 인기는 높아져 가는곳마다 환영을 받게되고
일은 쉽게 풀리곤 하여 TV로 밥을 먹으면서도 TV는 무섭구나를 새삼 느꼈다.
일일연속극을 오래 하다보면 별의별 일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한 번은 삼천포시 유지들이 몰려와서 공영 방송이 삼천포 시민을 모욕했다고
강력하게 항의를 해왔다.
사연인즉 박노식 씨가 "잘못하면 삼천포로 빠져버린당께로"라고 했다는 것이다.
기억에 없는 일이라 녹화테이프를 들어보니
춘천의 어느 다리 밑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다가 약을 파는 데
그때 즉흥적으로 신나게 떠드는 속에 삼천포가 있지 않은가.
인쇄된 대본을 보여서 작가가 무죄임을 증명하고.
박노식 씨도 흥이 나서 떠벌리다가 내뱉은 말이지 의도적인 것은 아니고.
모든 게 연출자의 불찰 탓이니 용서하시라고
기회가 닿으면 명예 회복을 위해 삼천포로 야외 녹화를 가보겠다고
백배 사죄하여 매듭을 지었다.
또한 드라마가 방송되자마자
포항제철에서 항의전화가 왔는데
포철 임직원 중에 콧수염을 기른 사람은 한 명도 없다는 것이었다.
포철 부장 역을 맡은 문오장 씨가
얼굴이 펑펑해서 관록이 없어 보인다고
콧수염을 기른 것이 화근이었다.
콧수염을 기르건 말건 개인의 자유 아닌가도 생각했지만
나중에 포철에 가보니 박태준(朴泰俊) 사장 휘하에
준군대식 경영 관리 체제임을 보고는 콧수염이 있을 수 없음을 알게 되었다.
KAL 스튜어디스인 한혜숙을 만나고자
민지환이가 기숙사를 방문한 장면이 나오자마자 KAL에서도 난리가 났다.
스튜어디스 기숙사는 금남의 집인데 제집 드나들 듯 남자가 드나드니
스튜어디스의 이미지에 금이 갔을 뿐 아니라
양가집 규수들이 KAL에 들어오겠느냐는 것이다.
이미 방송된 분은 어쩔 수 없고 다시는 기숙사 장면은 만들지 않기로 합의를 했다.
1975년 봄에 KAL에서 유럽 노선이 취항하게 되자,
첫 비행기에 좌석을 7개를 제공할 터이니
파리로케이션을 하겠느냐는 제의가 왔다.
공짜로 파리 구경이라니 마다할 까닭이 없다.
정순일 국장을 인솔자로 하고, 김노인 부부, 한혜숙 스튜어디스, 작가, 촬영 기사,
나는 첫 취항기를 탔다.
마침 장예준(張禮準) 상공부장관이 무역 관계 회의를 주재하러
파리에 가느라 동승하고 있었다.
파리에서 뭐를 찍어야 될지 고심하던 우리들은
장관께 출연 요청을 했더니 [꽃피는 팔도강산]의 위력은 대단해
쾌히 승낙하지 않는가.
작가가 즉석에서 대사를 만들어 한혜숙 스튜어디스의
기내식 서비스를 받으면서
장관이 유럽 시장 개척을 위한 전략을 몇 마디 이야기하는 장면을 녹화하였으니
홍보 드라마 역할도 이런저런 데서 수행한 셈이다.
정부 홍보 프로그램이라는 이단아로 출발을 하면서도
대가족 제도 안에서의 인간 모양과 정을 그린 내용이 소구력이 있어서
398회까지 장수할 수 있었던 것 같으며
잘 살아보세라는 국민적 공감대 아래 드라마가 보조를 같이 한 것이
성공 요인으로 짚인다.
그러고 보니 26년 전에 끝난
[꽃피는 팔도강산]은 국민들과 일희일우를 함께 한
행복한 일일 연속극이었으며,
출연자 중에 이미 김희갑, 박노식, 문오장의 세 분은 유명을 달리 하였다.
모두가 호랑이 담배 먹던 아득히 먼 옛날 이야기다.
..............................................................................................................
김수동(金秀東)
1958 동경 세이죠대학 문예학부 졸업 / 1955~1963 동경 다이에이 촬영소 조감독
1965~1971 '신필름' 등에서 영화감독 / 1972~1992 KBS 드라마 PD
* 상훈 : 백상예술대상 (1978, 1981, 1987) / 서울시 문화상(1992)
* 작품 : [꽃피는 팔도강산] / [아내] / [옛날의 금잔디
2004-11-27 11:01:24
'드라마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포츠서울 <중국어판 리메이크 꽃피는 팔도강산> (0) | 2008.02.27 |
---|---|
포철 명예회장 박태준씨가 말하는 <꽃피는 팔도강산> (0) | 2008.02.27 |
<꽃피는 팔도강산> 그후 30년 어떤 책자에 쓴 연출자의 변 (0) | 2008.02.26 |
<꽃피는 팔도강산> 그후 30년 어떤 책자에 쓴 작가의 변 (0) | 2008.02.26 |
KBS-TV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은 (0) | 2008.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