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꽃핀 한국 도자기(22)
일 도공 선망의 상표 조선도맥 후에
우리는 尊階의 후손을 만나기위해 尊階의 묘소가있는 야쓰시로시(八代市 高田村)의 平山을 떠났다. 예의 바른 야쓰시로가마(八代窯)주인 사카이(注井政枝) 모녀는 배웅을 잊지 않았다.
八代市 日奈久 東町에 있는 고다야끼 아가노(高田燒 上野)窯는 존계의 묘소가있는 高田 平山에서 차로 10여분 거리였다.
큰길에서 벗어나 골목 안쪽에 자리잡은 그 전시장 앞에서 앞에서 우리 서울신문사 학술 조사단 일행은 누가 먼전지 모르게 실소를 했다.
<元祖 高田燒>의 커다란 간판을 보았던 때문이었다.
“아니 이동네두 원조 싸움인가?”
“그러게말야 우린 음식 가지고 원조를 찾는데 이동네는 밥그릇 가지고 원
조를 찾는군“
일단 안으로 들어간 일행은 벽에 붙여놓은 안내판을 보고 어리둥절해졌다. 도자기 원조 싸움은 우리가 실소로 날려버린 그 이상으로 심각한 거이었다.
<알려드리는 말씀.
高田燒 八代窯의 酒井正枝와 우리 上野 家門과는
일체의 혈연 관계가 없습니다>
주인인 11대 上野才助씨와 수인사를 나누고 나서 우선 그 안내판의 내력부터 물어 보았다.11대 아가노씨는 갑자기 흥분을 하면서 우리가 조금전에 들렸던 八代窯의 사까이 여사를 헐뜯기 시작했다.
“그 여자는 분명히 일본계입니다.그런데 아가노 야끼가 유명해지다보니까
자신두 존계의 핏줄을 이어 받았다고 선전을 하는겁니다.세상에 이럴수가
있습니까?“
듯밖의 얘기였다.
사까이여사는 선대에서 번주의 명을받아 尊階의 맥을 이었노라고 우리에게 분명히 얘기를 했다.그것은 정신과 기술을 이었다는것이지 핏줄을 이었다는 얘기가 아니었는데 11대 아가노씨는 핏줄부터 들먹이고 있는것이었다.
“누가 뭐래도 고다야끼의 정통은 우리 가문입니다.우린 존계 초대의 직게
입니다.초대때부터 상감을 구었고 3대때부터 활발 했습니다.4대때부터
호소가와 성주의 명령으로 이후 30년 동안 상감만 집중적으로 구어 왔습
니다.이고장을 상감기법의 중심지로 만들어 놓은것이 우리 가문인데 이
젠 너도나도 존계의 핏줄이라고 야단들입니다“
그러면서 그는 사까이여사가 날조 했을것이라는 세계도를 펼쳐놓았다. 尊階의 2男에서 분파되어 맥을 이은것으로 되어 있었다. 필자는 부정과 긍정 사이에서 잠시 머리속이 혼란해졌다.
正枝여사 모녀가 의도적으로 존계의 후손인양 세계도를 만들어 고다야끼의 정통처럼 선전을 해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하나이고 그녀가 우리에게 얘기한대로 번주의 명을 받아 정통을 이었다는것을 강조하다보니 오해의 요지가 있는 그런 세계도가 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둘이었다.
실제로 존계의 2남 족보엔 아들이 없어 제자에게 맥을 잇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하나 묘하게 생각되는것은 바로 그들의 인상이었다.어찌된일인지 우리에게 일본인이라고 얘기한 사까이 여사는 후덕한 우리네 이웃의 아주머니같은 얼굴이었는데 조선인의 정통 후예라고 강조하는 11대 아가노씨와 그의 아들의 얼굴은 아무리 뜯어봐도 전형적인 일본인의 얼굴이었다.
“시조인 존계의 산소는 이집에서 가꾸겠군요?”
필자는 방금 다녀온 尊階의 초라한 묘소를 떠올리며 으례 그렇다는 대답이 나올걸로 짐작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물어보았다.
“아 그건..”.
11대 아가노씨는 갑자기 우물주물 하면서 그건 3男인 도토키(十時)집안에서 돌본다는 얘기를 했다.
설명인즉 尊階는 원래 호소카와(細川家)의 비호를 받아 가라쓰(唐津)에서 아가노(上野)로 옮겨와 정착을 했는데 호소카와 아들이 이곳 성주가 되면서 3남만 上野에 남겨놓고 장남과 차남을 데리고 다시 고다무라(高田)의 平山으로 옮겨왔다는것이다.
명치 이후에 성주의 비호를 못받게 되자 후손들은 도업을 포기하고 장사를 하기 위해서 고다무라보다 번화하고 또 온천지대로 새롭게 각광을 받기 시작한 야쓰시로 시로 옮겨왔다는것이다.
생활이 어렵다보니 초대 산소에 무심할수밖에 없었고 그래도 형편이 나은 上野의 3남 후손들이 산소를 돌보아 왔는데 그게 언제부터인가 전례로 굳어져 버렸다는것이다.
무언가 앞뒤가 안맞는 얘기였지만 尊階라는 인물의 출신부터가 미궁이니 확인해볼 길이 없었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원조와 핏줄을 강조하는 그의 모습에서 조상의 위업을 계승하고 가꾸려는 겸허함이 없다는 점이었다 선조까지도 장삿속으로 이용하려는듯한 얄팍한 상혼만이 엿보여 11대 아가노를 다시 한번 쳐다보게 만들었다.
11대 아가노씨는 자기집안의 내력이 적힌 책들을 꺼내 부인을 시켜 급히 카피를 내오게 했다.그 자료들을 받아들고 나오면서 일행은 여엉 마음들이 개운칠 못했다.
우리는 다시 구주 자동차도로를 한시간여 달려 北九州시 못미쳐에 있는 해발 901미터의 福地山麓으로 접어 들었다.北九州 國定公園이었다.
福岡縣 田川郡 赤池町,
이 계곡에 자리잡은 上野는 때마침 도자기 축제로 왼동네가 떠들석 했다.동네 입구에서부터 7.6키로미터의 일주도로 주변엔 26개 窯와 전시장이 늘어서있고 각 요에서 쏟아져나온 도자기들이 마당이 좁다고 길까지 즐비했다.
집집마다 내건 깃발들이 차량행렬과 인파속에서 바람에 나부끼는 모습등도 가히 장관이었다.
주최측이 지나가는 차안으로 마구 던져넣는 안내 팜프렛 속에서 존계의 위업은 더욱 찬란했다.
<부산 성주 尊益의 아들..가등청정공의 從徒로 일본에 귀화 上野喜藏高國이라고 개명했고..豊田小倉藩의 33만석을 하사받았고..수질이 좋고 유약의 채취가 가장 완벽한 이곳에서 細川忠興公의 지도로 開窯,400년의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고 현대적인 감각과 세련미를 더한 오늘의 아가노야끼를 만들어내는데 이바지 했다>
우리 일행은 존계의 3남 후손이 경영한다는 十時窯를 찾았다.八代市의 11대 아가노씨가 <元祖>를 내세우는것처럼 이곳도 예외는 아니었다.<上野窯 宗家.十時窯 元本家>라는 대문짝만한 간판이 협소해보이는 집과 전시장을 압도하듯이 세워져 있었다.
도조 존계의 13대라는 도토키(十時開甫)씨와 인사를 나누었지만 도자기를 사기위해 밀어닥치는 손님들로 해서 제대로 얘기를 나눌수가 없었다.
실례를 무릅쓰고 추녀밑으로 끌어내어 신문지를 깔고 앉아 얘기를 나눠봤지만 존계의 대를 잇고 그 기술의 맥을 이어온것은 장남 차남이 아니라 3남인 자기 집안이라는 열변 외엔 들을것이 없었다.
왜 성씨가 十時가 됐느냐고 물었더니 존계의 고향이 한국의 사천지방에 있는 十時鄕이어서 처음부터 그렇게 불리워졌다는것이다.
과문의 소치일지도 모르지만 사천지방의 十時鄕이란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것이어서 존계의 실존 인물설에 대해선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 장남과 차남 집안과는 더러 교류가 있습니까?”
十時開甫씨는 단호한 얼굴로 머리를 저었다.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서로간에 내왕이 없다는것이다.그들이 존계의 핏줄을 내세워 서로 정통이라고 우기는것은 역시 장삿속에 불과할뿐이라는 생각이 앞서 대화를 잇고싶은 흥이 싹 가셔버렸다
존계, 그는 과연 실존 인물일까? 후손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그대로 그는 부산성주의 아들이었고 내 나라와 내 겨레를 유린한 적장을 사모하여 정말 제발로 그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온것일까?
<아가노야끼는 유약을 多重 多樣하게 활용한 전통적 공예품으로서 밥그릇으로 사용하면 독을 제거하여 중풍을 예방 할수있고 속에 담긴 음식물이 부패하지 않으며 술을 담으면 술맛이 좋아지고 다른 도자기에 비해서 가볍다>등등의 특징이 써있는 팜프렛을 다시 들여다보면서 필자는 <조선 도공의 후예>라는 말이야말로 일본에서 도자기를 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갖고싶어하는 브랜드요 노우하우라는 생각을 하면서...원조 싸움도 그런 맥락으로 이해 하는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어쨌든 熊本縣 아가노의 도토키가마(十市窯)와 야쓰시로가마(八代窯), 그리고 福岡縣 아가노의 도토키가마(十市窯)에도 조선 도맥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에 접근 한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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