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고다야끼의 도조가 된 존계
서울신문사 학술 조사단 일행을 태운 점보택시는 가고시마(鹿兒島)현을 벗어나 九州 자동차 도로로 들어섰다.
구마모토(熊本)현 八代市의 高田村에 조선인 사기장인이었던 尊階(어느 기록에는 尊海로 나온다)의 후손들이 일본 도자 문화의 또하나 우뚝한 봉우리를 형성 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차안에서 다시 읽은 관광 안내 책자에 의하면 구마모토현은 지름만도 4km가 넘고 깊이가 100m나 되는 세계 최대의 분화구를 가진 阿蘇五岳의 활화산으로해서 일본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꼽히고 있는 곳이었다.
특히 구마모토시에 있는 구마모토조(熊本城)는 임진왜란때 우리나라를 침공한 가토기요사마(加藤淸正) 가 그의 탁월한 축성술로 완성한 일본 3대성의 하나로서 지붕이 조선 기와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외에 가고시마현은 백제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무수한 고적과 유물들로 해서 우리나라와는 고대때부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는것을 알수 있다.수박겉 핥기식으로 도자기만 둘러보고 다니는데도 빠듯한 일정이어서 가고싶은곳,보고싶은곳을 다 돌아보지 못하는 아쉬움을 간직한채 일행은 일단 八代市에서 하차를 했다.
일본측의 기록에 의하면 尊階는 임진왜란때 부산 근처의 성주였던 尊益의 외아들이었다고 한다. 왜장 加藤淸正을 사모하여 그를따라 일본엘 왔고 처음엔 가라츠(唐津)에 머물렀다가 아가노(上野)촌에 정착을 했다는것이다.
도자기 기술이 뛰어나 당시의 실력자인 細川家의 부름을 받아서 御用窯에서 일을 했으며 마침내 고다야끼(高田燒)의 陶祖가 됐다는것이다.
아리타의 李參平도조나 苗代川의 朴平意도조에 비하면 출발부터가 무언가 개운칠 못했다.더군다나 加藤淸正이 죽었을때 세상을 비관하고 머리까지 삭발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기록해 놓은것을 보았을때 솔직한 심정으로 필자는 그 후손들을 만나보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임진왜란당시 부산 근처의 성주중에 尊이나 尊益성씨, 또는 그 비슷한 이름조차 찾을길이 없고 성주의 아들이 도공이었다는것도 신빙성이 없을뿐더러 난리통에 머리만 제대로 굴리면 선조의 뼈대 하나쯤이야 여반장으로 급조할수도 있겠다싶어 나름의 호기심이 발동한것도 사실이었다.
"윤교수님 이번엔 한번 거꾸로 추적을 해봅시다"
"거꾸로 추적을 하다뇨?"
"우린 조선 사기장인들의 후손만 찾아 다녔는데 반대로 순수한 일본인 도
예가를 한번 찾아 봅시다.변죽을 치면 복판이 운다고 누가 압니까? 기대
치 않은 소득이 생길른지.."
일행이 고다야끼 야쓰시로가마(高田燒八代窯)를 먼저 찾아간것은 바로 그런 이유에서 였다.
20여평 정도의 전시실이자 응접실로 안내를 받아간 일행앞에 어려선 꽤나 복스럽다는 소리를 들었을법한 노파 한분이 공손하게 명함을 내밀었다.
<高田燒八代窯 酒井 正枝>
복사를 한것이 아니라 한지를 명함 크기로 오려서 또박또박 쓴 붓글씨였다.그녀가 바로 八代 지방의 여러 窯중 가장 유명한 窯를 가지고있으며 八大 지방에서 상감기법을 전수한 대표적인 작가인 사까이(酒井)여사였다.
올해 75세,처음엔 남편을 따라 도자기를 배웠지만 남편이 세상을 떠난 이후 독자적으로 작품에 몰두,오늘에 이르렀다는것이다.
尹龍二교수의 고증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상감기법은 고려시대 이후 맥이 끊겼다가 1963년 廣州窯의 창시자인 고 趙小守,유근형씨등에 의해서 다시 전승작업이 시작 됐됐다고 한다. 그러나 八代의 경우 임진왜란 이후부터 유일하게 계속 그 맥이 이어져왔고 따라서 고다야끼의 특징이 바로 상감기법이라는것이다.
"상감기법을 가르쳐준사람이 조선인 도공 尊階로 알고있는데요.어떻게
조선 도공의 후예도 아니면서 그 기법을 전수 했습니까?"
"명치 9년에 우리 선조들이 번주의 명에 의해서 尊階의 정신을 게승해 가
지고 도예를 시작 했다고 합니다.그때부터 존계의 뜻을 이어받았음으로
우린 비록 한국인은 아니지만 고다야끼의 전통과 맥을 이어왔다고 자부
를 하게 되었지요"
윤용이교수가 질문을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요즘 상감기법을 도입한 전승 도자기를 만들고 있는데요
보신 소감을 좀..."
"전에는 너무 옛날 형식에만 매달려 있어서 저런식으로 가다가는 안될텐
데 하는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그런데 얼마전에 본 작품은 전통기법
에 현대적인 감각을 가미했더군요.한국의 상감기법두 미래가 있다고 생
각 했습니다"
사까이여사는 차를 내온 처녀를 일행에게 소개를 했다.장녀인 마리꼬양이었다.
이 八代窯의 후계자라는 얘기에 아들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아들이 하나 있지만 도예엔 별로 뜻이 없는것 같아서 딸에게 물려주기로 했다는것이다.
작년말에 동경의 백화점에서 모녀의 작품전을 열었는데 많은 도예가와 평자들이 어머니의 작품보다도 딸의 작품에 더 관심을 기우렸다고 한다.
마리꼬양은 月山이란 호를 가지고 있다면서 일행에게 작명서를 보여주었는데 뜻밖에도 호를 지어준분이 이방자여사의 부군인 李垠公이었다.
도자기에 관심이 많은 이은공과 사까이여사 집안은 오래전부터 왕래가 잦았다고 한다.
일행은 마리꼬양의 안내로 근처에 있다는 尊階의 묘소를 찾았다.
八代窯에서 불과 10분거리,길옆 밭두렁에 한그루의 느티나무가 서있고 그밑에 尊階의 비석이 서 있었다.
李參平비나 朴平意의 비에서도 그들의 영광에 비해 碑가 너무 초라하다는 느낌을 받아 왔지만 이 碑에 비한다면 그쪽은 차라리 대우를 받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소를 관리하는 사람이 없나요?"
"글쎄요 후손들이 있지만 고속도로 때문에 곧 옮기게 된다는 말두있구...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는게 아니라 마리꼬양은 분명히 뭔가를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얘길 안하는것만 같았다.
"尊階란 인물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점심식사를 대접 하면서 넌즈시 물어 보았다.
"어머니랑 그 얘길 많이 하고 있어요.존계는 조선시대 사람이 아니라 고
려시대 사람이다 등등 정설에 반대되는 학설이 많이 나오고 있어요.그러
나 그 누구도 섯불리 파헤치려 하질 못하구 있어요"
"그건 또 왜요?:
"우린 존계에대해서 더 이상 조사 하는것을 원치 않아요.그가 실존 인물
이 아니라고 밝혀지면 고다야끼의 전통과 맥은 물론 우리들의 꿈 자체까
지 개져버리고 고다야끼 자체가 혼란에 빠질거에요"
어떻게 보면 일리있는 얘기인지도 모른다. 일단 일행은 그 후손들을 만나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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