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이집트편편상(3)소설 알렉산드리아

첫날 2007. 11. 11. 20:01

(내가 알렉산드리아엘 간다고?)

여행이 결정 되었을 때 내가 흥분한것은

피라미트와 스핑크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에겐 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있었다.


그 얘기를 늘어 놓기 위해서 잠시 옛날 얘기를 해야 한다.


나는 문학소년 시절에 시인 신동문 선생을 알았다.

당시 조선일보 신춘 문예에 <풍선기>로 등단한 선생은

폐결핵 환자로 청주 도립병원에 입원하고 계셨다.


나와 나의 친구들은

중앙 문단에 등단한 시인이

같은 청주 하늘밑에 계시다는 생각만으로도 행복했고

거의 매일이다시피 도립병원을 찾아 갔다.


우리가 청주지역 고교생들의 연합 써클인

<푸른문 문학동호회>를 만들어

선생을 지도 선생님으로 모셨고

그 소중한 인연은 선생이 타계하신 지금까지도

모두의 가슴속에서 살아 있다.

 


 

1963년 겨울의 어느 날이었다.

 

당시 경향 신문사의 특집부장으로 재직 하고 계셨던 선생은

천안에서 통일호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고 있었다.


그때 열차안에서 선생은 웬 술취한 헌병 장교가 30대의 여자들에게

계속 추근대는것을 목격했다.

여자들이 반응을 보이지 않으니까 저러다 말겠지 했는데

그 장교는 서울에 도착 할때까지 포기 하질 않았다.


<이봐요 군인>

마침내 선생이 일어섰다.

<내 아까부터 보고 있었소.여자들이 귀찮아 하면 그만둬야지

장교 체면에 이게 무슨 꼴이요? >

여지껏 눈살을 찌푸리며 보고만 있던 승객들도 모두 일어나 한마디씩 했고

일단 약점을 잡힌 장교는 슬며시 꽁무니를 뺐다.


여인네들은 선생에게 감사하며 자초지종을 털어 놨다.

자기는 대구에서 탔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출옥하는 남편을 마중오는 길인데

그 헌병 장교가 대구에서부터 계속 추근대더라는 것이다

알고보니 그 헌병 장교는 열차를 타고 있는 군인들을 감독하는 장교였다.


30대의 혈기방장했던 선생은 격분했다.

근무시간중에 술을 마셨다는것도 그렇고 특수한 신분을 이용해서

여인들에게 안하무인의 행동을 했다는것이 더욱 가증스러웠다.

선생은 때마침 지나가는 이동 헌병을 불렀다.

<이 열차에 타고 있는 당신네 대장을 불러와요>

선생의 서슬에 헌병들은 주눅이 들었다.

그러나 잠시후에 헌병들이 나타나서는 아무리 찾아도 그 장교가 없다는것이었다.

제풀에 찔려서 피하고 있음이 분명 했다.

<좋아요 이따가 서울역에서 내리면 좀 봅시다>


그런데 서울역에선 웬 중년의 신사가 두 여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중의 하나가 그 신사에게 달려가 쓰러지듯 손을 잡았다.

<아니 어떻게 된거에요?>

<응 예정보다 하루 먼저 내보내주는기라>

중년신사는 바로 형무소에서 나오기로 한 여인의 남편이었다.

여인에게서 자초지종의 애기를 전해들은 중년신사도 흥분했다.

그래서 선생은 중년신사와 함께 서울역의 헌병 파견대 사무실엘 찾아 갔다.

헌병 장교는 없고 아까 열차안에서 만났던 이동 헌병들만 있었다.

 

<당신네 대장 어디갔나?>

헌병들은 서로 눈치만 살필뿐 대답을 못했다.

선생은 대장의 자리인듯한 책상에 앉아 주먹으로 책상을 쳤다.

<당장 대장 데리구와 그렇지 않았다가 너희들 모두 큰일 날줄알아>

 

대장이 풀이 죽어 들어왔다.

<잘못 했습니다>

중년신사가 헌병 장교의 배를 주먹으로 쳤다.

<됐어요 이만큼 망신을 당했으면 이사람도 정신을 차렸을 겁니다>

선생은 중년 신사를 말려 놓고 헌병 장교에게 일렀다.

<앞으로는 조심하시요 당신 같은 사람 때문에 60만 국군이 욕을 먹어서야 되겠소?>

<네 명심 하겠습니다 잘못 했습니다>


선생은 자녁을 같이 하자는 중년 신사의 청을 거절 하지 못했다.

그리고 거기서 통성명을 했다.

<신동문이라고 합니다>

중년 신사의 눈이 커졌다.

<그럼 혹시... 시인 신동문씨?>

<아니 어떻게 아십니까?>

<하이고오 이거 우짜겠노? 혹시 기억하실른지요? 저는 이병주라고 합니다>

<네? 아니 국제신보에 계시던 이병주씨?>

<하하 이런 인연이..하하 신선생 내가 법정에서 10년 선고를 받았는데

그중 5년은 신선생 때문이었다는것을 아시는지요?> 

 

이미 만난적은 없어도 두 선생은 서로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4.19가 나던 1960년.

신동문 선생은 당시 <사상계>의 경쟁지였던

월간 종합교양지 <새벽>의 주간이었다.

그해 여름 <조국을 말한다>라는 특집 제목을 정해 놓고

필진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었다.


고정 필진은 많았지만 시대의 흐름에 걸맞는 새로운 필진이 필요 했다.

그러던중 누군가 국제신보의 주필로 있는 이병주씨를 소개했고 집필을 의뢰하자

바로 <조국부재>라는 제목으로 대답해 왔다.

<조국을 말한다>라는 특집에 <조국부재>라니?

이병주 선생은 그때만해도 시세를 너무 앞서 간다고 할까?

이 글은 한반도의 영세중립국을 주장한 논문으로

독자들의 열광적인 반향을 이르켰다.


그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이병주 선생은 4.19 뒤에 조직된 교원노조의 고문이었다는것도

군사정부의  비위를 거슬리게 했다.

교원노조를 용공조직으로 몰고 있던 군사정부는

이른바 혁명 재판소에서 이병주 선생에게 10년 징역을 명하고

2년 7개월 만에 특별 사면으로 풀어 주었다.

선생에게 걸었던 혐의가 별게 아니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신동문 선생과 이병주 선생의 이 극적인 해후는

가히 운명적이었다.

  

그후 신선생은 이병주 선생과 어울리면서 소설을 한번 써보라구 했다.

이병주 선생은 닷새만에 중편 500매를 써가지고 왔다.

그가 교도소에서 체험한 <옥중기>였다.

 

그것을 읽고 신동문 선생은 크게 흥분했다.당장 잡지에 실려야 했는데

<새벽>은 종간되어 지면이 없었다.

<신구문화사>에 근무 하면서 월간 <세대>잡지의 편집 고문이었던 신선생은

<세대>편집장인 이광훈씨를 불러서 원고를 넘겨 주었다.

 

신진 문학 평론가였던 이광훈씨도 흥분했다. 다만 제목이 마음에 걸렸다.

4.19와 5.16을 겪은 후여서 <옥중기>는 너무 흔한 제목이었다.

<그럼 “소설 알렉산드리아”로 합시다. 그냥 알렉산드리아가 아니라 “소설

알렉산드리아“>


그렇게 해서 <소설 알렉산드리아>는 세상에 나왔다.

이병주 선생이 마흔 네 살때쓴 데뷔작이었다.

<세대> 잡지 6월호!

독자들은 열광 했고 일간지들은 연일 입을 모아 이 소설을 극찬 했다

<주간 한국>은 한 페이지를 할애하여 소설의 마술사 이병주의 탄생을

세상에 알렸다.

 

<소설 알렉산드리아>

그것은 두분 선생에 대한 기억과 함께

알렉산드리아란 도시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나의 뇌리에 자리 잡아 있었고

이제 나는 그곳에 가고 있는 것이다.

 


  

<태양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이병주 선생이 즐겨 쓰던 말이었다.

그는 작가란 <햇빛에 바래진 역사를 새로 쓰는 복원자,

준엄한 사관(史官)>이나 다를바가 없다>면서 역사 소설을 썼다.

내가 선생이 쓴 <바람과 구름과 비>를 각색하여

월화 사극으로 방영한 소이도 평소에 그분의 작품에 반해 있었다는

한 증거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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