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5시.
일행은 김영철 부장의 안내로
앙코라와트의 일출을 보기 위하여 호텔을 떠났다.
어제 오후
니악뽄 사원과 푸레아칸 사원을 돌아 보기 위하여
앙코라와트를 지나갔다.
가슴에는 정문에서 발행해준 출입증을 달고..
즉석에서 사진을 찍어
발행해주는 출입증은 1일 3일 5일권이 있다는데
우린 3일권을 끊었다. 40불이란다.
그리고 차창 밖으로 본 앙코라와트.
차를 타고 그냥 지나나가면서
아아 저걸 보기 위해서 캄보디아엘 왔구나
저걸 보기 위해서 룰루오스 유적군을
예비 탐사했구나 하는 감동이 일었다.
아직 캄캄한 새벽인데도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진입로를 따라
앙코르와트엘 들어서고 있었다.
우리도 더듬더듬 진입로로 들어섰다.
새벽 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으로 보이는 앙코르와트.
이미 나는 앙코르와트에 대한 어줍잖은 지식으로
머릿속이 무척 혼란 스러웠다.
자료도 들쳐 보았고
인터넷도 뒤졌다.
그런데 아무런 예비지식도 없이
밀림속에서 처음 앙코르와트를 발견한 <부유보> 신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1863년
앙리무어가 최초로 앙크로와트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 13년전인 1850년
프랑스의 샤롤 에밀 부유보 신부가 선교를 위해 캄보디아엘 왔다가
밀림에서 길을 잃었다.
닷새동안 정글을 헤메면서 기진맥진한 눈에
최초로 들어온것은 바욘의 거대한 부처님의 얼굴이었다.
프랑스로 돌아온 부유보 신부는 그가 본 사실을 얘기 했다.
<샴족이 사는 밀림 속에서 "죽음의 궁전"을 보았다.
사람의 그림자라고는 보이지 않는 엄청나게 큰
"죽음의 궁전"이 밀림 속에 있었는데
입구에는 일곱개의 머리를 가진 뱀을
거인들이 안고있는 석상이 줄지어 있고
하늘 높이 솟아있는 연꽃모양의 탑이 있었다.
그리고 그 도시는 베르사이유 궁전보다 컸다>
사람들과 학자들은 그 말을 듣고 비웃어 버렸다.
그 조그마한 크메를인들이 베르사이유 보다 큰 건물을 만들어?
웃기고 있네
그리고, 몇 년 후 브유보 신부는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마침내 앙리 무어가 이곳을 찾아온다.
부유보 신부가 본것은 정확했다.
왼쪽이 파리 남서쪽의 베르샤이유궁전이고
오른쪽이 박진호(35·KAIST 문화기술연구센터 선임연구원)씨가
디지털로 복원한 앙코라와트이다
.
베르사이유 궁전은 가로로 걸쳐 580미터,
그러나 앙코라와트는 베르샤이유의 두배,
동서로 1500미터가 넘고 남북으로 1300미터나 된다.
우리는 인근의 매점에서 빌려온 푸라스틱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노천 다방 앙코르와트에서 시켜온 커피입니다>
김작가의 얘기에 모두들 웃었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동안 이곳을 둘러보고 나서 소감을 피력한
유명 무명의 사람들을 떠 올렸다.
이곳을 들러보고 감동한 토인비는
<할수만 있다면 이곳에서 유적과 더불어 남은 인생을 살고 싶다>
고 했다.
서양철학의 태두가 동양의 거대한 미로를 발견한것이다.
그리고 그 외 많은사람들이
<신들의 도시>
<파괴의 상처로 얼룩진 신의 걸작>
<상상이 조각 조각 해체되는 신들의 도시>
<신들이 만들어 놓은 퍼즐>
<신의 정원>등으로
이곳을 소개 했다.
이윽고
신들이 살고 있는 메루산의 형상을 빌어와
힌두의 소 우주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는
65미터의 중앙탑 옆에서 해가 뜨기 시작했다.
8시55분
아니다. 사진에는 그렇게 찍혀졌지만
두시간이 덜 가니까 여기선 6시 55분이다.
전세계에서 모인 관광객들이
앙코르와트의 일출을 보고 있다.
천년 유적지에서 일출의 사원을 바라보는데
어찌 감동하지 않을수가 있나...
춘분때의 일출은
중앙탑의 정 중앙에서 시작 된다고 한다.
새삼 모든 사원들이 동향인데 비하여
유독 이곳만 서향이라는 생각이 났다
이것은 비슈느(힌두교의 지혜와 보존의 신)가
서쪽을 관장하는 신이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고
서쪽은 죽은 자의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설,
그리고 점성학과 천문학을 대입한 설도 있다
캄캄한 어둠속을 더듬 더듬 걸온길을
이제 다시 보자.
(역광이라 건물이 어둡다. 그래서 카메라를 위해선 오후에 찍어야 한다.)
대양을 뜻하는 인공의 해자다.
폭이 100미터
해자에 놓인 돌다리만도 220미터다.
그 양편으로 사원을 수호하는 나가상이 우뚝 솟아있다.
금생과 내생을 의미 하는 돌다리를 건너면
다시 540미터의 들길..
내부 진입로를 따라가면 좌우로 두개의 건물이
대칭으로 서있다.
장서각이다
사실 앙코르 사원들의 장서각은
책을 쌓아 두는곳이 아니라
벽이나 린텔(상인방)에 종교의 내용을
부조로 새겨 책의 역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곳 장서각은 그러한 흔적이 별로 없어
용도를 정확히 알수가 없다고 한다
탑문을 끼고 신전을 빙 두른 담의 길이가
5.6키로 미터
우리나라 리수로 10리길이 넘는다.
빈 공간으로 남기 쉬운 외벽에도 "춤추는 미희"로 불리우는
압사라를 조각해 놓았다.
1500여개의 이 압사라들은 똑 같은 구조가 한개도 없다.
수많은 압사라중
유일하게 치아를 들어 내며 웃는 압사라.
아무튼
이 앙코라와트 사원을 짓기 위해 들어간
7톤짜리 기둥만도 1천8백개,
돌로 된 방이 2백60개,
슈퍼컴퓨터로 설계하는 데만 2년이 걸린다는데
불과 37년 만에 어떻게 이런 건물을 지을수가 있었는가?
그리고 당시 앙코르 유적지 일대의 인구는
무려 1백만 명으로 추정 하고 있다..
당시 파리나 런던이 10만~20만 명에 불과했다니
얼마나 그들의 문화가 장엄하고 화려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앙코르와트앞 연못가에서
무심히 뛰어 노는 원숭이들을 바라보면서
의문과 의문이 꼬리를 문다.
그렇다면 그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왜 그많은 사람들이 한조각 역사서도 남기지 않고
이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는가?
왜 어떻게 이토록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과 벽화를 남길수 있었는가?
왜 이런 사원이 수백년동안 정글에 묻혀
역사서에서 사라져 버렸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