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꽃핀 한국 도자기(14)이삼평의 후손들
<도업복귀 대대로 이어진 열망>
佐賀縣西松浦郡有田町2075번지,
13대 李參平인 金ケ江三兵衛(義人)씨의 주소다.운전기사가 주택가의 비좁
은 골목을 몇번이나 들락날락 하다가 가까스로 찾아낸 이 집은 선대의 영광
과는 동떨어진 초라한 여염집이었다.
손바닥만한 앞마당엔 이층으로 올라가는 간이식 철제계단이 있었고 그 위엔 지붕의 한옆을 헐어서 지은듯한 콘테이너 반쪽만한 가건물이 얹혀져 있었다.
현관문을 여니 60대 초반의 노 부부가 무릎을 꿇고 앉아 일행을 맞이 했
다.13대 李參平 부부였다.
일행은 그의 안내를 받아 옆방으로 들어섰다.다다미 8조정도의 장방형의
방안엔 다목적으로 쓰이는 커다란 상이 놓여 있을뿐 이렇다할 장식이 없었
다.다만 빨간 바탕에 마름모꼴의 검은 사각형 네개가 붙어있는, 벽에 걸린
액자 하나가 유난히 시선을 끌었다.
"이집의 문장인 모양이죠?"
"그렇습니다"
"무슨뜻이 담긴건지 설명을 좀 해줄수 없을까요?"
일순 당황해 하는 기색이 역역했다.
"사실은 저도 잘 모릅니다"
그러면서 그는 미안 하다면서 몇번이고 머리를 조아렸다.순박해 보이는 얼
굴이 부끄러움으로 상기되어 오히려 질문을 던진 필자 자신이 미안해졌다.
참고가 될만한 자료가 있으면 보여 달라고 했더니 초대때부터 내려 왔다는
문서를 보여 주었다.
타쿠(多久)번주가 초대한테 내려준것으로서 1년에 3석의 쌀과 면화를 종신토록 지급 하겠다는 약속 문서라고 했다.
초대 李參平에 관한 무슨 새로운 자료가 없는가 해서 집중적으로 질문을
해봤지만 이미 세상에 알려진것 이외의것은 없는듯 했다.
도조 李參平의 세계표에 의하면 6대까진 陶業을 계승해 왔지만 경영과 기
술, 그리고 재정적인 문제로 더 이상 지탱을 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그러
나 그때나 지금이나 아리타는 요업의 고장이었기때문에 도자기에 관련된 일
을 배놓고는 할일이 없었다.그래서 7대 李參平은 남의집 종업원으로 도자기
일에 종사를 했고 그런 남의집살이가 12대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제 선친께서도 늘 한탄을 하셨습니다.짊어진 이름은 큰데 능력은 없으시
다는거죠.7대 할아버지때부터 계속 같은 생각들을 해오셨을겁니다"
7대 이후부터 切齒腐心해왔던 선조들의 한을 되새기는듯 13대 李參平의
눈에 물기가 어렸다.
"그래서 전 처음부터 도업과 담을 쌓고 철도청의 공무원이 되었습니다"
영원히 도업과의 인연을 끊을 생각이었느냐고 물었더니 펄쩍 뛰면서 힘주
어 말했다.
"아니죠 그 반댑니다.남의집 도자기 공장에가서 일을 해봐야 겨우 먹구 사
는것 하나 보장된다는것뿐이죠.벌어서 가마를 만들어 자영을 한다는것은
늘 꿈으로 끝나게 마련입니다.저는 내대에서 어떻게 하던지 가마를 하나
만들어 자식한테 물려주는게 소원이었습니다.그래서 퇴직금이 필요 했던
거죠"
그러나 철도청 공무원으로서 평생을 바쳤는데도 그는 아직 가마를 갖지
못했다.
"현재로선 특별한 일거리가 없으신것 같은데 생활은 어떻게 하십니까?"
그는 잠시 말문이 막힌듯 하다가 공무원 연금으로 살고 있다고 낮은 목소
리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희망을 버린것은 아닙니다"
그러면서 그는 아들 얘기를 했다.
金ケ江省平,외아들로서 올해 서른 한살, 아직 총각이라고 했다.그는 일찍부터 자신이 선대의 명성을 되찾는 후예가 되겠다고 결심,후쿠오카에서 조형전문대학을 수료하고 현재는 남의 도자기 공장에서 일을 하고있다는것이다.
'후예'부자 (李參平의 13대후손 金ケ江三兵衛문과 그의 아들 金ケ江省平)-아리타(有田) 崔海國기자
"대전 엑스포에서 작품을 출품해 달라는 의뢰를 받았습니다.지가 근무하
는 직장일이 바빠서 충분한 시간을 내지 못하는게 안타깝습니다.퇴근해
오면 그때부터 부자가 작업실에서 밤을 샙니다"
대전 엑스포에서 출품의뢰를 받았다는것도 뜻밖의 얘기고 작업실 얘기도
우리 서울신문사 학술 조사단 일행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작업실이 어디 있는데요?"
13대 李參平의 안내로 우리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처음 안마당에 들어
설때 눈에 뜨인 지붕 한옆의 가건물이 바로 그들의 작업실이었다.
녹이슨 철제 계단을 올라가니 어지럽게 빨래가 널려 있었다.5평정도의 작업실엔 완성, 미완성의 도자기들과 그 파편들이 널려있었다.400년전,선대의 영광을 되찾기 위한 13대 李參平 부자의 집념과 몸부림이 느겨져 일행은 잠시 말문을 잃었다.
동행인 최해국기자가 카메라를 들이대자 그는 한복으로 갈아입겠노라고 렌즈를 막는 시늉을 했다.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한복을 갈아 입으러 내려간 그가 도대체 올라올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웬일인가 해서 내려가 보니 옷고름을 맬줄 몰라 노부부가 함께 쩔쩔 매고 있었다.필자가 옷고름을 매어주자 그는 언젠가 찾아온 한국인으로부터 받은 선물인데 옷고름과 대님을 맬줄 몰라서 한번도 입어본일이 없다면서 열적게 웃었다.
사진을 찍고 일행은 13대 李參平과 함께 낮에 찾았던 초대 李參平의 묘지
를 다시 찾았다.비석을 어루만지면서 새삼 감회가 깊은듯 그는 다시금 눈시
울을 적셨다.
"사실은 중간에 초대 할아버지의 이 묘소를 잃었습니다.제 선친도 그게
한이 돼서 백방으로 찾아 나섰는데 우연히 여기서 땅에 묻힌걸 발견하게
됐어요 소화 42년의 일입니다"
그때부터 비석은 윗쪽 3분의 1가량이 떨어져 나간채였다고 한다.
"이 꽃은 누가 가져다 놨습니까?"
이미 시들어버린 묘비앞의 화병을 가르키자 한달에 두번,초하루와 보름에
그의 아내가 꽃을 갈아주면서 <힘을 달라>고 기도를 하러 온다고 했다.
"대전 엑스포엔 작품을 출품 하실겁니까?"
그는 괴로운듯 머리를 저었다.
"청탁을 받았다는것만도 우리에겐 놀랍고 고마운 일이었습니다.그러나 아
직은 작품을 내놓을 형편이 못 됩니다.부자가 그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
죠.일단 만들어 놓은것을 보고서 결정 해야될것 같습니다"
"지금은 가마도 없잖습니까?"
"어차피 남의 가마를 빌려야 되겠죠"
허공을 응시하는 그의 얼굴이 추연해 보였다.정말 그들 부자에게 힘을 주
어 선대의 영광을 되찾고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당당히 가슴을 펴고 대하는
그런 후손이 되게 해달라고 빌고 싶었다.
도조신사 (일본이 도자기의 할아버지로 추앙하는 이삼평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아리따의 도조신사.이삼평이 첫 백자를 구어낸 고요지다. 묘소는 초라 한데 비해 밖으로 들어내놓은 도조관련 유적은 무척 번듯하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디가서 소주나 한잔 하시지요”
필자의 경험으로 봐서 쓸만한 진짜 얘깃거리는 술좌석에서 나오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런 얄팍한 계산이 아니라 정말 13대 李參平에겐 술이라도 한잔 대접하면서 진심으로 그를 위로해주고 또 격려도 해주고 싶었다.
그가 안내한 집은 「李」라는 韓食불고기집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그날이 쉬는 날이어서 우리는 눈에 띄는 근처의 일본식당으로 들어갔다.
음식을 주문해 놓은 막간에 그는 잠시 집엘 다녀와야겠다면서 일행이 대절한 운전기사를 데리고 나갔다. 이내 선물이라면서 작은 백자 술잔 한개씩을 싸가지고 왔다. 자신이 직접 구운 것이라고 했다.
아마 실험용 작은 가스가마에서 구운것 같았다. 임진왜란으로 외출했던 한국의 솜씨가 4백년의 세월을 지나 필자의 손에 들어왔다는 생각에 미치자 감개무량한 감회마저 스쳤다.
그는 필자의 마음을 헤아렸는지 고맙다면서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눈엔 어느듯 눈물이 고였지만 우리 일행은 못본채 술잔을 기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