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서 꽃핀 한국 도자기

일본에서 꽃핀 한국 도자기(11)명공 용칠이

첫날 2010. 5. 26. 06:55

 

2 <번요 탈출 용칠이 명품 당사자 구어내>

 

  사가(佐賀) 현 이마리(伊万里) 교외  오카와치야마(大川內山)의 나베시마(鍋島) 번요(藩窯)는 나베시마 번 영주의 요이다.

  1675년 나베시마(鍋島) 번주의 명령으로 아리타(有田)에서 강제이주한 조선도공들의 피땀으로 이룩된 가마이기도 했다.


  삼태기처럼 생긴 이 천연의 요새에는 당시 1천여 명의 조선도공들이 유폐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조선도공들의 한이 골짜기마다에 굽이굽이 서리는 동안 번의 명성은 장장 3백년이나 계속되었다.

 

 


  이번에 이야기하는 조선도공의 후예 <용칠이>는 그 번요의 역사속에서 음각된 비극의 주인공이다.


  일본쪽 기록에 의하면 그를 매우 뛰어난 명공(名工)으로 적고 있다.

  어려서부터 눈썰미가 야무져 거의 만능에 가까운 재주를 가진듯 하다.

  도자기 제작에 숙달된 장인이었음은 물론 가마를 쌓는 일에서부터 유약원료의 배합, 조각과 목수일에도 능했다. 그래서 자연히 번요에서도 인정을 받게 되었다. 그가 만든 도자기가 불량품일지라도 번사들은 용칠의 작품 한점을 얻기위해 혈안이 되다시피했다.


  그러나 불량품은 예외 없이 깨뜨려버려 번사들의 미움을 샀다.

 

 

  그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번사들은 결국 매질을 했다. 이유는 용칠 휘하의 도공들이 일을 태만히 한다는 것이었다.


<불량품 모두 깨버려>


  “도대체 무슨 일을 그따위로 시키고 있소? 이사람은 밑바탕을 그리는 사람이고 저 사람은 세공하는 사람이오. 그리고 도토(萄土)를 만드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날 더러 도토를 반죽하라는 것은 잘못하는 일이라는 것을 아시오”

 용칠은 체벌하는 번사의 채찍을 뺏어버리고 도리어 호통을 쳤다. 번요에 무인 도공들의 일상 규칙중에서 가장 엄한것이 항명이었다. 그는 대우받는 명공이어서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언젠가 세죽(細竹) 덤불에서 주워온 병을 대하고 나서는 그와 같은 작품을 만들어 보겠다는 일념에 몰두하고 있는 용칠의 태도를 무언의 반항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번사들은 용칠을 번주에게로 끌고갔다. 이미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도공들이 하는 일은 흙에다 생명을 불어넣는 일이오. 당신네들 눈에는 내가 아무 일도 안하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오. 하지만 나는 지금 좋은 물건을 만들기 위해 참담한 고통속에 있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번주는 반항으로 보았다.

 그래서 독방에 감금된 어느날 오카와치 산을 뒤흔드는 폭풍우가 몰아쳤다. 보다 자유스러운 바깥 세상에 나가 명품을 만들고 싶다는 오직 한가지 창조의 욕망이 꿈틀거렸다.


  탈출을 감행한 그날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뇌성벽력과 함께 한 찰나의 길이 열렸다. 낯이 익었다. 가마에 지필 땔감을 마련하느라 수없이 오르내린 길이었다.

  그는 길을 버리고 산등성이로 방향을 바꾸었다. 번사들이 쫓아올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가시덤불 길을 택한 그는 얼굴과 손발이 상처투성이가 되었다.


  어림짐작으로 헛디딘게 벼랑이었다. 굴러 떨어지면서 가까스로 나한송 노목에 어깨를 부딪히는 바람에 목숨을 건졌다 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세죽덤불에서 주워 간직했던 도자기병의 촉감이 와 닿았다.

  어둠속이라 다시 꺼내 볼 수는 없었지만 가느다란 목을 더듬어 내려갔다. 그러다 이내 볼록하게 솟아나온 몸동을 믿음직스럽게 매만졌다.

 “고이마리(古伊万里·당시 명성을 얻고있던 도자기)가 아무리 비싼 값에 팔려도 아직은 조선도자기를 따라잡을 수 없지... ”


 열살 때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의 음성이 들리는듯 했다.

 그렇다 내가 지닌 도자기는 조선의 것이 틀림없다. 조선에 두번이나 출병한 번주가 조선에서 가져온 견본 도자기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祖父의 조국애 계승>


  “처음에는 흙도 유약도 다 조선에서 가져왔지. 도공들도 조선에서 붙잡아 오고... 이놈의 땅에서 빌린거라구는 불밖에 없어. 그래서 사쓰마에선 히바카리라는게 나왔다고 하더만”

 용칠은 번사들이 <文祿慶長의 役>이라고 할 때 마다 <壬辰倭亂>이라고 다시 고쳐 가르쳐주곤 하던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려보았다. 그러면서 천연의 요새처럼 되어있는 험준한 청라산 연봉과 병풍바위 안쪽의 유폐지 오카마치와치(大川內山)을 빠져나왔다. 비요(秘窯)라고도 일컫는 요새를 천신만고 끝에 용케 탈출한 것이다.


  그때가 일본역으로 천명(天明)8년이니까 1788년의 일이다. 그리고 임란 발발로부터는 1백90여년이 지난 뒤였다. 세월이 그토록 흘렀는데도 조선도공 후예들에 대한 고삐는 조금도 늦추지 아니했다.

  그로 미루어 임란 당시 끌려왔던 조선도공들이 일본 초기 생활에서 받아야 했던 핍박이야 오죽 했겠는가. 大川內山 무연고묘탑 속에 묻혔거나 가족이 있어서 따로 묘지를 차지한 그 많은 조선도공들이 바로 피해자이기도 했다.


  일본의 기록인 도베<砥部> 도자기의역사(陶磁器의 歷史)는 용칠이 大川內山 번요에서 자취를 감춘 뒤의 사연을 계속 기술하고 있다. 내산(內山)밖의 하늘을 바라보는 순간 자유롭고 싶었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여기저기를 숨어서 방황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눌러 앉은데가 오늘의 시고쿠 에히메(愛媛) 현 마쓰야마(松山) 시 교외 도베(砥部)다.

 

 

 

  자신의 작품세계를 갈망한 용칠은 양질의 도토를 찾아 도자기제작에 몰두하는 가운데 거기 사람들에게 기법을 가르쳤다.


  한편 이마리 번요에서는 용칠을 찾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이 번요가 자랑하는 명품도자기 <이로나베(色鍋) 도자기>비법이 大川內山바깥으로 전해지는 것을 금기시했던 번에서는 마침내 용칠의 소재를 파악한다.


  번요에서 사용했던 소에지마(副島) 용칠이라는 이름 대신에 구메(久米) 용칠로 행세를 했지만 결국 나베시마의 번사에 붙잡히고 만다. 용칠은 탈출 3년째가 되는 1800년 大川內山으로 끌려와 비운의 생애를 마쳤다.

  그해 12월 28일 가세(嘉瀨) 형장에서 처형되어 다른 조선도공들에게 공포의 본보기가 되도록 츠즈미(鼓) 고개에서 효수했다고 전해진다.

  용칠의 작품으로 알려진 당사자(唐獅子)가 有田泉山 벤자이다이샤(弁財大社)에 있는데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大川內山은 세계관광지로 변했다. 조선도공들은 피땀을 흘리고, 藩主는 영화를 누렸던 그 터전에 나베시마번요공원(鍋島藩窯公園)이 조성되어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여기저기에 세워진 숱한 석상물(石像物)가운데는 勇七을 기리는 석비 하나가 외롭게 끼여 있었다.

 

 


  누가 이 가련한 조선도공을 기렸나 했더니 기증자가 金武平七이다. 그도 아마 金씨 성을 가졌던 도공의 후예 <평칠이>였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쳤다. 언제 건립했다는 기록은 없었다.

  그러나 明治年間(1867-1912년)에 세운 다른 석상물에서 金武平七을 발견하고는, 勇七의 석비 역시 明治시대에 세운 것이 아닌가 했다.


<평칠이 碑 세워줘>


  오늘을 사는 일본인들은 九州 한쪽의 도자기고향 히젠(肥前)지방에서 구워낸 옛 도자기들의 그림(문양)을 통해 그 속에 묻힌  서정적인 자연을 곧잘 예찬한다.

<들제비꽃이 피면 고사리가 움트고,

종달새가 우짖는 봄이 온다.

그리고 푸른 잎을 흔드는 여름이 지나면 밤이 여물고,

들참새가 한가로운 가을을 맞는다>

  이런 화중유시적( 畵中有詩的)인 도자기속의 그림은 누가 그린 것인가.

그것은 조선도공들이 만든 백자(白瓷)라는 캔버스에 역시 조선도공들의 붓끝이 닿아서 창조된 백자예술이었다.


  회화적요소가 담긴 그 도자기는 이른바 <이로나베시마(色鍋島)>로, 지금까지 이마리 일대의 명기로 꼽힌다. 大川內山 번요공원 입구에는 이로나베시마를 상징한 대형도자기가 조형물로 설치되었다.

 

 


  백자를 종모양으로 구워 주렁주렁 달아맨 조형물과 함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도자기조각을 모아 마치 젖무덤처럼 만들어 놓은 또다른 조형물도 볼거리였지만, 필자의 심사를 흔들어 놓았다.

 

 

 

 

  이로나베시마에 얼룩진 조선도공의 눈물이 보이는 듯 했다. 백자 종(鐘)에서는 또 한맺힌 절규가 울려오는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大川內山에서 해마다 窯元市(4월1-5일)를 비롯한 鍋島藩窯 가을祝祭(11월1-5일), 伊万里 아마추어 陶藝展(4월1-10일) 캠프場개설(7월15일-9월5일)등 푸짐한 행사를 펼치고 있다.

조선도공들이 만들었던 이로나베시마를 가지고 축적한 富를 즐긴다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다.


  우리 서울신문 학술조사단 일행은 급히 大川內山을 떠났다. 조선도공들이 日本 땅에 끌려와서 백자를 처음 구워낸 30분 거리의 아리타(有田)로 향했다. 아리타에 가서 우리 陶脈의 긍지를 느껴보는 가운데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고자 함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