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탁영선생(김일손)연보 상(1/2)
濯纓先生年譜 上
탁영선생<휘일손>연보 상(1/2)
<原文: 濯纓先生年譜 金大有 著 高宗11[1874] 국립중앙도서관 일산古2511-10-25, 參考譯文: 增補濯纓先生年譜 2006.9.30. 感慕齋宗中, 解釋 : 2008. 8. 15. 金順大, 編輯 :金乙泰>
濯纓先生年譜序(탁영선생 연보 서)
余嘗讀濯纓先生文集以宇宙間間氣文章節行冠冕一時尤庵宋先生弁卷而表章之有可以百世徵信
나는 일찍이 탁영선생(김일손, 1464~1498)의 문집을 읽어보았는데, 하늘까지 간간이 기가 서리고 문장과 절개있는 행실이 한 시대의 으뜸이었다고 우암 송선생(송시열, 1607년~1689)이 그 서문에서 드러내어 밝혔으니(表章)[1] 가히 영원히 믿어 증거할 만하다.
[1]탁영집서(濯纓集序)의 원문;濯纓先生以文章節行冠冕一時不幸遭逢燕山……, 1668년 하지(夏至)날에 작성
若其道義出處立朝本末尙有未得其詳後先生四百載年譜書出先生猶子三足公所著也雲仍散在東南不識是書者多始克合謀刊布
그러나 선생의 도의가 기록된 자료와 조정에서 활약하신 여러 가지 사실에 관해서는 아직 상세한 것을 얻지 못하다가 선생이 돌아가신 지 400년 후에 연보가 나타났으니 선생의 조카 삼족당(김대유, 1479~1551)이 저술한 것이다. 후손들이 동남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어서 이 책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비로소 의논을 모아 간행, 배포하기로 하였다.
原集之闕謬就此訂補務圖幷行而不悖復昭陵三䟽卽集中漏編之一也貫日精忠讀之凛然而煌煌大義旣欝復伸實自先生啓之豈非有辭於千秋乎
원집(기존의 문집)에서 빠지고 잘못된 점도 이 연보를 참조하여 함께 수정 , 보완토록 힘썼으니 도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에 걸친 소릉(문종의 정비, 단종의 생모)복위의 상소가 곧 원집중에 누락된 부분의 하나인데, 해를 꿰뚫는 한결같은 충성(貫日精忠)은 읽는 이로 하여금 오싹하게 한다. 밝고 밝은 대의가 막혔다가 다시 펴진 것은 실로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어찌 천추에 전할 말이 남아 있지 않겠는가.
鳴呼運値陽九躬蹈奇禍尙忍言哉天之生材也厚而卒又阨其命何也倘先生享有年壽終始遭遇隆盛與當時諸賢彙征于朝致 君堯舜之志大可展焉不幸而不得至於如是奚獨曰命也
아, 운수가 재앙을 만나 일신이 기구한 화를 당하였으니 어찌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하늘이 인재를 낼 때에는 후하게 하고서 끝내는 다시 재앙을 내렸으니 무슨 운명이 그러하겠는가. 혹시 선생이 오래 사셨더라면 융성한 시대를 만나 당시의 여러 어진 학자들과 함께 조정에 나아가 임금으로 하여금 요순(堯舜 ; 어진정치)을 크게 펼 수 있게 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루지 못하고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유독 운명이라고만 말할 수 있겠는가.
已先生事行昭載 國乘名碩之讚述學者之尊慕固不待此書而有所輕重今玆後孫之勤懇誠以不明不仁之足懼天之生材也爲先生厚抑亦彌久而彌有可驗也夫
이미 선생의 사실과 행적이 나라의 자료에 소상하게 실려 있으므로 명현(名賢), 석학(碩學)들의 찬술(讚述)과 학자들의 존경심이 이 책(年譜)이 나온다고 해서 가벼워지거나 무거워지는 것은 아니나, 지금 후손들이 정성을 다하고 있는 것은 진실로 사실을 밝히지 못한다면 어질지 못해(不仁)질 까봐 이것이 두렵다. 하늘이 선생을 인재로 후하게 내렸다는 것은 세월이 오래 지나면 더욱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上之十一年甲戌季夏後學南陽洪淳穆謹序
지금임금(고종) 11년 갑술(1874년) 계하(6월) 후학 남양 홍순목[1] 근서
[1]洪公은 高宗때의 文臣으로 字는 熙世, 호는 汾溪, 시호는 文翼公이다. 1884년(헌종 10년) 文科에 오른 후 황해도 관찰사, 吏曹判書, 右議政 등을 거쳐 領議政으로 致仕하신 분이다.
○皇明英宗皇帝順天八年{我 世祖大王七(十)年}甲申
1464년 갑신 (세조 10년) 선생 출생
春正月辛酉七日午時先生生于慶尙道淸道郡上北面雲溪里少微洞之舊第
<1464년> 봄 1월 7일 오시(午時, 낮 12시 전후) : 경상도 청도군 상북면 운계리 소미동(현재 이서면 서원동) 옛집에서 출생하다.
先生世居金海高祖遯翁公{諱伉字而正與圃隱鄭文忠公夢周從遊}嘗過運溪愛其溪山淸邃始卜築焉子孫因居而先生生於此先生生時前溪有紫氣如虹經日不散先生生而容端正氣象宏厚啼聲 如洪鍾
선생의 선조들이 대대로 살던 고장은 김해였는데, 고조 둔옹공(遯翁公, 諱는 伉이요 字는 而正, 圃隱 鄭文忠公 夢周와 교유)이 일찍이 운계리를 지나다가 산과 계곡이 깊고 맑음을 사랑하여 여기에 처음으로 터를 잡아 정착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고 선생 또한 이곳에서 태어나게 되었다. 선생이 출생할 때 앞내에 마치 무지개와 같은 자줏빛 서기(瑞氣:紫氣)가 일어 하루해가 지나도록 흩어지지 않더니 마침내 선생이 태어났다고 한다. 태어난 선생의 모습은 단정하고 기상(氣象)은 매우 중후하며 울음소리는 마치 큰 종(洪鍾)소리처럼 우렁찼다고 한다.
{初先生皇考南溪公聘龍仁李氏委禽之夕夢三駿馬自天而下化爲靑雲三染飛入懷中後生先生兄弟三人遂命名字以應夢兆長曰駿孫字伯雲仲曰驥孫字仲雲季卽先生}諱馹孫字季雲{初字舜佑}號濯纓子又伊堂又雲溪隱史又少微山人{以所居地名爲號}又詠歸學人又臥龍樵夫{弘治戊申築雲溪精舍於臥龍峯因以爲號}又磻溪居士{壬子築竹林精舍於木川之磻谷有是號}
처음에 선생의 아버지 남계공(南溪公)이 용인(龍仁) 이씨(李氏)를 부인으로 맞을 때, 존안례(尊雁禮)를 올린 날 저녁 부인의 꿈에 준마(駿馬) 세 마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세 줄기의 청운(靑雲)으로 변하여 가슴속으로 날아든 일이 있었는데, 그 후 선생 3형제를 얻게 되고 이름 또한 꿈의 징조에 따라 맏이는 준손(駿孫 자는 伯雲). 둘째는 기손(驥孫 자는 仲雲). 막내, 즉 선생의 휘(諱)는 일손(馹孫 자는 季雲, 初字는 舜佑)이라 했다.
선생의 호(號)는 탁영자(濯纓子), 이당(伊堂), 운계은사(雲溪隱史), 소미산인(少微山人 ; 주거지 지명을 따서 지음). 영귀학인(詠歸學人), 와룡초부(臥龍樵夫 ; 1488년 9월 와룡봉 밑에 운계정사를 신축한데서 이 호를 지음), 반계거사(磻溪居士 ; 1492년 목천 반계에 죽림정사를 신축한데서 이호를 지음) 등 이었다.
○憲宗皇帝成化元年乙酉{先生二歲}
1465년 을유 (세조 11년) 선생 2세
○二年丙戌{先生三歲}
1466년 병술 (세조 12년) 선생 3세
○三年丁亥{先生四歲}
1467년 정해 (세조 13년) 선생 4세
○四年戊子{先生五歲}
1468년 무자 (세조 14년) 선생 5세
先生天資穎悟通敏年方四五歲長者敎以文字一過輒記與羣兒遊不爲維戲有或欺誑者 必怒而叱之不與之遊盖其剛嚴正直天性也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뛰어나게 총명하고 깨달음이 민첩하여 나이 겨우 4~5세에 어른들이 문자(文字)를 한번 가르치고 지나가도 얼른 기억하였으며 동네 아이들과 더불어 놀되 난잡한 놀이는 하지 않으며, 혹 속임수를 쓰는 아이에게는 반드시 성내어 질책(叱責)하고 더불어 놀지 아니하였다. 대체로 선생의 천성은 강직하고 엄했으며 정직하였다.
○五年{我 睿宗大王元年} 己丑{先生六歲}
1469년 기축 (예종 원년) 선생 6세
○六年{我 成宗大王元年} 庚寅{先生七歲}
1470년 경인 (성종 원년) 선생 7세
○七年辛卯{先生八歲}
1471년 辛卯(성종 2년) 선생 8세
春在龍仁寓舍
<1471년> 봄, 용인 임시 거처(寓舍)에 살다.
是歲先生皇考南溪公{諱孟字子進}以藝文奉敎赴召時先生妣李氏夫人適歸寧于龍仁蒲谷面之鴨皐里先生從焉公難於旅宦全家北上寓居于聘宅之傍築別堂於舍之東北以爲先生兄弟讀書之所是爲三樹精舍金東峰時習書其額又有記{精舍今毁土人稱濯纓臺後峯曰濯纓峯皆以先生故得名云}
이 해에 선생의 아버지 남계공(南溪公 ; 諱 孟, 字 自進)이 예문관 봉교(藝文館奉敎)로 부임할 때 선생의 어머니 이부인(李夫人)은 마침 용인 포곡면 압고리(龍仁 蒲谷面 鴨皐里)의 친정에 와 있었는데, 선생도 여기에 따라와 있었다. 공의 객지 벼슬살이가 불편한지라 전 가족을 이끌고 북상하여 처가 곁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사는 집 동북에 별당을 신축하여 선생 3형제의 독서(讀書) 장소로 이용하였는데, 당호(堂號)를 ‘옥수정사(玉樹精舍)'라고 했다. 동봉(東峰) 김시습(金時習) 선생이 현판(扁額)을 쓰고 또 기문(記文)도 지었다.{지금은 그 정사(精舍)가 철훼되어 남아 있지 않으나 토착민들이 그곳을 탁영대(濯纓臺), 뒤편의 산봉우리를 탁영봉(濯纓峰)이라 불렀는데. 이는 모두 선생이 명성을 얻은 데 연유한다.}
○南溪公學襲家庭{先生王考諱克一字用協號慕菴學於冶隱吉先生再隱德不仕至孝旌閭私諡節孝先生}又嘗師事江湖金先生叔滋得聞圃冶所傳程朱之學日誦小學大學用力於誠正格致先生之學盖有自來矣
남계공(南溪公)은 가정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선생의 할아버지는 諱가 극일(克一)이요 자는 용협(用協)이며 호는 모암(慕菴)인데,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에게 배우고 그의 영향을 받아 평생 벼슬하지 않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旌閭)되고 사시(私諡)하여 이르기를 절효(節孝) 선생이라 했다.} 남계공은 또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 佔畢齋의 父) 선생에게 사사(師事)하여 포은(圃隱)과 야은(冶隱)을 통하여 전수된 정주학(程朱學)을 득문하였으며 『소학(小學)』 『대학(大學)』을 일상 암송하여 성정격치(誠正格致 ; 誠意 正心, 格物, 致知 : 『대학(大學)』의 修身)에 힘썼다. 선생의 학문은 대체로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었다.
秋九月始受小學於家庭
<1471년> 가을 9월, 가정에서 처음으로 『소학(小學)』을 받다.
南溪公以先生夙慧欲其晩就不使入學先生見人讀書必潛聽而黙誦之時公以諫院正言疏論權貴辭歸鴨臯先生持仲兄梅軒公所讀論語而請學
남계공(南溪公)은 선생의 총명함이 너무 조숙하여 조금 천천히 성취(成就)되기를 원하여 입학(入學)을 시키지 않았는데, 선생은 다른 사람이 독서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몰래 듣고 마음속으로 암송했다. 당시 공은 사간원 정언(司諫院 正言)으로서 권세 있는 고관을 상소하여 논박하고 사직한 다음 압고리(鴨皐里)에 와 있었는데, 어느 날 선생이 중형인 매헌공(梅軒公)이 읽는 『논어(論語)』를 가지고 와서 배움을 청하였다.
公奇之曰此非小兒可讀之書也授以小學日誦數百言問於公曰所謂聖賢者其爲人容貌或有異於凡人乎曰耳目口鼻與凡人同曰均是人也或爲聖賢或爲凡人何也曰盡人道者是父子親君臣義夫婦別長幼序朋友信之謂乎曰然曰然則聖賢我亦可爲也公大奇之
남계공은 기특하게 생각하여 말하기를, “이 책은 어린아이가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라고 하며 『소학(小學)』을 주었다. 그랬더니 하루에 수백언(數百言) 씩을 암송하여 공에게 묻기를, “이른바 성현(聖賢)은 사람된 생김새가 보통사람과 혹 다른 점이 있습니까?”라고 했다. 공이 대답하기를,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보통사람과 같으니라.”라고 하니 “보통사람과 같다면 혹은 성현(聖賢)이 되고 혹은 범인(凡人)이 되는데 그것은 왜 그러합니까?”라고 했다. “능히 사람의 도리를 다할 수 있는 사람은 성현이 되고 다할 수 없는 사람은 범인(凡人)이 된다.”
“사람의 도리를 다한다는 것은 부자친(父子親), 군신의(君臣義), 부부별(夫婦別), 장유서(長幼序). 붕우신(朋友信)을 말함입니까?” “그러하니라.” “그렇다면 저 역시 성현(聖賢)이 될 수 있겠습니다.”라고 했다. 공은 매우 기특하게 생각했다.
○九年癸巳{先生十歲}
1473년 계사(성종 4년) 선생 10세
先生嘗云余自十歲至十二三讀四子書不過四五遍雖無所遺忘而便以三百遍定爲過程稍知爲學作文之法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10세부터 12~3세에 이르기까지 사서(四書)를 4~5회 읽은 데 불과하였다. 비록 잊은 곳은 없었으나 300회를 독서과정으로 정하여 익혀가니 차츰 공부와 작문법(作文法)을 알게 되었다.”고 한 적이 있다.
○十三年丁酉{先生十四歲}
1477년 丁酉 (성종 8년) 선생 14세
先生嘗云余十四五歲讀朱子通鑑綱目每至古人以忠言讜論立朝有氣節者未嘗不三復嗟歎
일찍이 선생이 말하기를, “나는 14~5세 때 주자(朱子)의 『통감강목(通鑑綱目)』을 읽었는데, 옛사람들이 입조(立朝)하여 충언(忠言)과 직론(直論)을 펴서 기개(氣槪)와 절조(節操)를 굽히지 않은 대목을 접할 때마다 거듭거듭 감탄했다.”라고 했다.
○十四年戊戌(先生十五歲}
1478년 戊戌(성종 9년) 선생 15세
春二月入泮官讀書
<1478년> 봄 2월 : 반궁(泮宮 : 성균관)[1]에 들어가 독서하다.
[1]성균관(成均館)은 조선시대 최고 국립 종합대학으로 1398년(태조 7년) 숭교방(崇敎坊:명륜동)에 건물을 준공하여 유학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이하 136명을 모신 문묘(文廟), 유생(儒生) 200명이 거처하는 동서재(東西齋) 등을 두었다. 입학 자격은 15세 이상의 자제로 4부 학당, 항교졸업자, 소과 합격자 등이었다.
先生年旣成童選入太學新學少年見先生動止侃侃言辭堂堂儼然有長者風憚與相從而識者知其爲遠大之器學爲文章根基厚而趣步正姜
선생은 이미 성동(成童)의 나이(15세)가 되어 태학(太學 ; 성균관)에 선입(選入) 되었다. 새로 들어온 소년 학동들은 보기에 선생의 거동이 강직하고 언사는 당당하며 의젓하며 장자(長者)의 풍모가 있는지라 더불어 상종하기를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식자들은 선생의 사람됨이 큰 그릇이요 학문에서는 문장(文章)의 기초를 두터이 하고 나아가는 방향과 속도가 올바름을 알았다.
木溪渾亦遊太學與先生同庚結爲深交嘗稱季雲乃渾之師表非渾之友也他日領袖士林膜謀巖廊黼黻皇猷笙鏞治道者季雲也如渾者只可隨其後塵而巳
목계(木溪) 강혼(姜渾)역시 선생과 같은 나이로 이때 태학(太學)에서 같이 공부하면서 선생과 깊이 사귀었는데, 일찍이 그가 말하기를 “계운(季雲)은 곧 나(渾)의 사표(師表)이지 친구가 아니다. 훗날 사림의 영수(領袖)요, 조정의 계책을 담당할 두뇌요, 제왕의 정사에 중심인물이요, 치도(治道)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사람, 바로 그가 계운(季雲)이다. 나 혼(渾)과 같은 사람은 다만 그 뒤를 따르는 티끌이 될 수 있을 뿐이다.”라고 했다.
三月壬午聘夫人丹陽禹氏于湖西丹陽之舍人洞
<1478년> 봄 3월 壬午(20일) : 서호(西湖) 단양(丹陽) 사인동(舍人洞)에서 단양(丹陽) 우씨(禹氏)를 부인으로 맞아들이다.
夫人兵曹參判克寬之女易東先生倬六世孫刑曹參議龍仁李讓外孫也幼有至性以孝女稱至是歸于先生
부인은 병조참판 우극관(禹克寬)의 여식으로 역동(易東) 우탁(禹倬) 선생의 6세손이며 형조참의 용인(龍仁) 이양(李讓)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하여 효녀라는 칭송을 받아왔는데 지금 선생에게 시집오게 된 것이다.
秋八月甲辰如淸道過善山謁漁隱鄭先生耕隱李先生辛亥至雲溪省祖墓于蘿蔔山
<1478년> 가을 8월 갑진(15일) : 청도(淸道)에 가는 도중 선산(善山)을 지나다가 어은(漁隱) 정(鄭)선생과 경은(耕隱) 이(李)선생을 뵙다. 신해일에 운계(雲溪)에 도착 나복산에 있는 조묘(祖墓)를 성묘하다.
鄭公名仲虔字敬夫先生之前外祖也能文學尙節義癸酉靖難以集賢典翰乞外爲比安縣監未幾辭歸與耕隱李公偕隱于善山之綱障里
정공(鄭公)의 이름은 중건(仲虔), 자는 경부(敬夫)인데 선생의 전 외조(外祖)이다. 문학에 능하고 절의를 숭상하였다. 계우정난(癸酉靖難) 때 집현전 전한(典翰)으로 있다가 외직을 자청하여 비안현감(比安縣監)으로 나갔는데 얼마 안 있어 사직하고 돌아와 경은(耕隱) 이공과 함께 선산 강장리(綱障里)에 은둔하고 있었다.
耕隱名孟專字伯純星州人兵曹判書審之之子 世宗朝登第官至司諫院正言有淸德直聲甲戌見時事艱危乞爲居昌縣旋卽棄官托以盲聲屢 召不起與漁隱江湖爲道義交
경은(耕隱) 이공의 이름은 맹전(孟專), 자는 백순(伯純), 성주인(星州人)으로 병조판서 이번지(李蕃之)의 아들이다. 세종조에 등제하여 벼슬은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까지 하였고 청덕(淸德)과 직성(直聲)이 있었다.
단종 2년(1454년), 세태가 어렵고 위태함을 보고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자청하여 나갔으나 곧 눈멀고 귀먹었다는 핑계로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生六臣의 한사람). 그 후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에도 불응하고 어은(漁隱), 강호(江湖)와 더불어 도의(道義)의 교유(交遊)를 하고 있었다.
先生過而謁之公甚器愛之示其述懷詩一絶先生和之曰先生韜晦久盲聲小子何知意欲同夜夜子規啼不盡九疑山色月明中
이때 선생이 지나다가 찾아뵙게 되었는데, 이공이 선생의 그릇됨을 매우 사랑하여 평소 품은 생각을 가지고 지은 시(詩;述懷詩) 1절을 보여주었다. 선생은 그에 화답(和答)하였는데, 그 시구(詩句)는 다음과 같다.
先生韜晦久盲聲(선생은 은둔하시며 눈멀고 귀먹다 하시니)
小子何知意欲同(소자 무엇을 알아 뜻을 같이하리까)
夜夜子規啼不盡(밤마다 소쩍새는 울고 울어 그지없고)[2]
九疑山色月明中(저 멀리 구의산은 달빛 속에 밝은데...)[3]
[2]단종이 내침을 당하여 영월에 유폐되어 있을 때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그 소회(所懷)를 표한 바 있다. 이를 본 많은 뜻있는 선비들이 눈물을 흘리며 화답(和答)하는 「자규사(子規詞」를 지어 애도하고 흠모하기를 그치지 않았는데 이를 은유(隱喩)한 듯하다.
[3]구의산(九疑山)은 중국 호남성(湖南省) 영원현(寧遠縣)에 순제(舜帝)의 종묘(宗廟)가 있는 산, ‘제위(帝位)를 선양하고 사양하고 한 성군(聖君) 순(舜)임금의 영혼이 잠든 저 구의산(九疑山)은 달빛에 밝은데 이 땅에서는 왕위 찬탈과 시해가…’하는 속뜻이 숨겨진 듯.
公大加稱歎又以吉詩一篇送行有古道巳云遠但見浮雲翔願言篤交誼善保金玉相之句公之稱許期待之重可見矣
이공은 크게 칭찬하고 고체시(古體詩) 한편을 지어 선생을 송별하였는데, 그 시구(詩句)는 다음과 같다. 이 시구(詩句)를 미루어 보면 선생에 대한 공(公)의 칭찬과 기대가 매우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古道巳云遠(옛 성현의 도는 이미 멀어가고)
但見浮雲翔(이제는 나는 뜬구름(소인)만 보일 뿐이네)
願言篤交誼(원컨대 우리 교분 두터이 하고)
善保金玉相(금옥 같은 바탕 소중히 보전함세)
九月癸亥還京師入泮齋
<1478년>가을 9월 계해(5일) : 서울로 돌아와 반재(泮齋 ; 성균관)에 들어가다
○十五年己亥{先生十六歲}
1479년 기해 (성종 10년) 선생 16세
秋八月癸酉與梅軒公同中漢城府進士初試
<1479년>가을 8월 계유(?) : 매헌공(梅軒公)과 함께 한성부(漢城府)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하다.
○十六年庚子{先生十七歲}
1480년 경자 (성종 11년) 선생 17세
春二月乙丑與梅軒公同赴禮曹覆試見屈
<1480년>봄 2월 을축(15일) : 매헌공(梅軒公)과 함께 예조(禮祖) 복시(覆試)에 실패하다.
旣屈人有慰之者先生曰科擧之業學與問背馳者也立志高遠者固不當爲此而士生斯世捨是亦無進身事君之路予今不得已而爲之然古人云業患不能精母患有司之不明此予所以自反處也况科場得失有未可知者乎
이미 낙방한 사람들 중 위로의 말을 하는 자 있어 선생이 대답하기를, “과거 보는 일은 학문(學問)하는 길과 서로 배치(背馳)되는 일이다. 보다 원대한 곳에 뜻을 둔 사람에게는 이 일은 본디 당치 않은 일이나 선비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과거를 버리면 임금을 섬기는 길에 나아갈 수 없으니 이번에 나는 부득이 과거를 보게 되었다.
그리고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학업(學業)에 정미(精微)하지 못함을 걱정하지 고시관(考試官)이 밝지 못함을 걱정하지 말라 했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 반성해야 할 점이지 과장(科場)에서의 득실(得失 ; 되고 안 되고)이야 알 바 아니다.”라고 하였다.
三月辛巳陪二親歸雲溪
<1480년> 3월 신사(1일) : 양친을 모시고 운계리(雲溪里)로 돌아오다.
南溪公以老病辭都摠府經歷全家還鄕先生與兄東窓梅軒二公俱從焉
남계공(南溪公)은 노병으로 도총부(都摠府) 경력직(經歷職)[4]을 사직하고 전 가족이 귀향함에 선생은 형 동창공(東窓公), 매헌공(梅軒公)과 같이 따르게 되었다.
[4]조선시대 군대조직, 즉 五衛(義興衛, 龍驤衛, 虎賁衛, 忠佐衛, 忠武衛)의 軍務를 총괄하던 관청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의 종4품 문관직.
秋九月辛卯始受學於佔畢齋金先生之門
<1480년>가을 9월 신묘(14일) : 점필재(佔畢齋) 김선생 문하에서 수학(受學)을 시작하다.
先生時在山房{卽節孝先生廬墓之室在蘿蔔山下是夏重修扁日蘿山書屋}讀書忽喟然而歎曰吾之讀書泛濫經史雖未嘗不警勵奮發然尙未知古人爲已之學虛過了光陰已十有七年矣
이때 선생은 산방(山房 : 즉 절효(節孝)선생이 시묘 때 쓰던 나복산 밑의 여막을 여름에 중수하여 현판을 ‘나산서옥(蘿山書玉)’이라 하였음)에 있었는데, 어느 날 독서하다 훌연 한숨짓고 탄식하며 “나의 독서가 비록 경서(經書)와 사기(史記)를 널리 독파하고 힘써 분발했는데도 아직 고인(古人)들이 이미 이루어놓은 학문(學問)도 모르고 있으니 17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고 말았구나!
今佔畢先生當世之道學君子也聞其丁憂在密陽盍往師之遂與梅軒公執贄往學與金寒喧宏弼鄭一蠹汝昌爲道義交授受講磨遂知爲學之方
지금 점필재(佔畢齋) 선생은 당세의 도학군자(道學君子)인데 들으니 친상을 당하여 밀양에 와 계신다고 하니 어찌 가서 배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매헌공(梅軒公)과 더불어 예물(禮物)을 가지고 가서 학업을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한훤당(寒喧堂) 김굉필(金宏弼),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등과 도의(道義)의 교유(交遊)를 하며, 강(講)을 주고받으며 학문을 닦았는데, 드디어 학문하는 방법을 알게 되었다.
○先生嘗言予性本少許可十七歲始遊佔翁之門得神交十有二人焉道學金大猷宏弼鄭伯勖汝昌李伯淵深源文章姜士浩渾李冑之冑李浪翁黿李仲雍穆遺逸南伯恭孝溫辛德優永僖安子挺應世洪餘慶裕孫音律李百源摠李正中貞恩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본래 성품이 남을 용납함이 적었는데 17세 때 점옹(佔翁) 문하에서 교유(交遊)하기 시작하면서 12인의 정신적 교우를 얻었다. 도학(道學)에서는 김대유(金大猷;宏弼), 정백욱(鄭伯 勖;汝昌), 이백연(李伯淵;深源), 문장(文章)에서는 강사호(姜士浩;渾), 이주지(李冑之;冑), 이낭옹(李浪翁;黿), 이중옹(李仲雍;穆), 유일(遺逸)에는 남백공(南伯恭;孝溫), 신덕우(辛德優;永僖), 안자정(安子挺;應世), 홍여경(洪餘慶;裕孫), 음율(音律)에는 이백원(李百源;摠), 이정중(李正中;貞恩) 등이었다.” 고 했다.
○盖東方性理之學圃隱鄭先生實倡之傳于冶隱吉先生冶隱傳于江湖金先生佔畢卽江湖之子也學襲家庭經術文章爲一世冠冕四方學者出其門下甚多先生及寒喧一蠹南秋江孝溫李再思黿其尢也此先生道學之淵源也
대체로 동방성리학은 정포은(鄭圃隱) 선생이 실창(實倡)하여 길야은(吉冶隱) 선생에게 전수하고 야은은 김강호(金江湖) 선생(佔畢齋의 父)에게 전수, 다시 점필재(佔畢齋) 선생에게 가정세습으로 전수되었는데 경술(經術)과 문장에서는 일세의 으뜸(冠冕)의 위치에 올랐으며 그 문하에서 많은 학자들이 사방에 배출되었다. 선생과 김한훤(金寒喧), 정일두(鄭一蠹), 남추강(南秋江;孝溫), 이재사(李再事;黿) 등이 뛰어난 분들이다. 이상이 선생의 도학(道學)의 연원(淵源)이다.
冬十二月丙寅掃自密陽
<1480년> 겨울 12월 병인(21일) : 밀양(密陽)으로부터 돌아오다.
○十七年辛丑{先生十八歲}
1481년 신축(성종 12년) 선생 18세
春二月癸亥復往密陽謁金先生受韓文
<1481년>봄 2월 병인(22일) : 밀양에 다시 가서 김선생을 뵙고 한문(韓文;韓昌黎의 문집)을 받다.
佔翁常謂先生曰君於詩文無所不能傳我衣鉢者君外無人他日文柄必歸於君矣朝廷之上文爲先須多讀昌黎集
점옹(佔翁)이 항상 선생에게 말하기를, “군(君)은 시문(詩文)에 있어서 능하지 않은 데가 없다. 나의 의발(衣鉢 ; 학문과 技藝)을 전할 사람은 군 이외에 아무도 없다. 후일 문병(文柄 ; 학문 또는 文治上의 권세)은 반드시 군에게 돌아올 것이다. 조정의 상문(上文)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창려집(昌黎集)을 많이 읽어야 한다,” 고 하였다.
○先生嘗云余十八歲讀韓文而喜之手不停披口不絶誦至千餘遍然後於文有進
선생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18세 때 한문(韓文)을 읽고 기뻐했다. 손은 잠시도 쉬지 않고 책장을 넘기고 입은 글 읽기를 끊이지 않았는데 1,000여 회에 이르도록 계속했다. 그런 연후에 문장에 진전이 있었다.”고 하였다.
○先生於著述立草千百言奔放雄博沛乎無礙滯見者望洋華人稱之曰此東國之韓昌黎也
선생이 저술(著述)에서 입초(立草)한 수많은 문장들은 자유분방하고 웅장하며 박식하여 물 흐르듯, 막히거나 그침이 없어 보는 사람은 마치 대양(大洋)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중국 사람들이 “이 사람은 동국(東國)의 한창려(韓昌黎)[5]이다.” 라고 칭송했다.
[5]창려(昌黎)는 한유(韓愈768~824)의 號이고 字는 退之, 中唐의 文豪로 柳宗元과 함께 古文復興으로 유명하다. 唐宋 8대가의 한 사람. 저서에 『韓昌黎集』50권이 있다.
每腹藁成磨墨滿硯一筆揮寫不復檢投諸篋中經累月始出而點化之或問故曰始起草猶有私意不自見其當改久然後私意除公心生始乃明知其醇疵此先生文章之造詣也
선생이 글을 쓸 때는 매양 마음속에 초고를 구상하고 벼루에 먹을 가득 갈아 일필로 써 내려가서 검토함이 없이 그대로 상자 속에 던져 넣어두었다가 여러 달이 지난 다음 비로소 꺼내어 교정하곤 하였다. 가끔 그 연유를 묻는 사람이 있어 대답하기를, “처음 기초할 때는 아직 사의(私意)가 들어 있어 당연히 고쳐야 할 곳을 스스로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오래 지난 다음에는 사의가 제거되고 공심(公心)이 생겨 비로소 순전하거나 흠결이 있는 곳을 훤히 알게 된다.” 고 했다. 이것이 선생 문장(文章)의 조예(造詣)이다.
秋七月丁酉偕秋江同遊龍門山
<1481년> 가을 7월 정유(24일) : 추강(秋江)과 함께 용문산(龍門山에) 유람하다.
秋江南孝溫號也爲人冲澹典雅胸襟灑落無一點塵埃氣倜儻慷慨好古有氣節年二十五上疏請復 昭陵嘗從金悅卿遊放迹物外先生結爲神交是行也同游名山有紀行錄
추강(秋江)은 남효온(南孝溫)[6]의 호인데 그 사람됨이 단정하고 품위가 있으며 마음씨가 깨끗하고 시원스러워 어느 한 곳 속된 곳이 없었다. 그 기상은 다른 사물에 구속받지 않고 대범하여 의기가 넘치고 감격 잘하며 옛것을 좋아하고 기상이 있었다.
25세 때 소능복위(昭陵復位)를 상소한 바 있으며 일찍이 김열경(金悅卿 ; 時習)을 좇아 방랑하며 속세를 벗어난 곳을 찾아 다녔다. 선생과 정신적인 교우관계를 맺고 이번 여행과 같이 명산 등을 동유(同遊)하였으며 기행록을 남겼다.
[6] 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음.
八月丙午謁元子虛先生于原州酒泉山中信宿而還
<1481년>8월 병오(4일) : 원주 주천(酒泉 ; 지금의 영월군 주천면) 산중에서 원자허(元子虛) 선생을 방문, 이틀간 유(留)한 다음 돌아오다.
子虛名昊號霧巷 世宗癸卯登科官至集賢殿直提學與南溪公爲文學之交 魯山癸酉棄官還鄕杜門謝世不出戶庭人莫得見其面搆亭於淸冷浦上流以望寧越丁丑服喪廬墓泣血三年
자허(子虛)의 이름은 호(昊)[7]요 호는 무항(務巷)인데, 세종 5년에 등과(登科)하여 관직은 집현전 직제학까지 지냈으며 남계공(南溪公)과는 문학의 교우였다. 노산(魯山) 계유정난 때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여 세상과 인연을 끊고 두문불출하여 집안사람들도 면대하기 어려웠다. 청냉포(淸冷浦) 상류에 정자를 짓고 영월을 우러러보다가 1457년(丁丑) 노산군(魯山君)이 돌아가시자 3년 동안 여묘(廬墓)하며 피눈물을 흘렸다.
[7]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음.
光廟以戶曹參議徵之誓死不就又嫌其居近於官府遂入酒泉山中居焉先生素聞其高節於南溪公至是與秋江拜公於土室公以故人穉子待先生如舊知已開懷問答語丙丁事甚詳
세조가 호조참의로 불렀으나 죽음을 맹세코 응하지 않았으며 거처 근처의 관부(官府)가 싫어서 주천(酒泉) 산중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선생은 평소에 남계공(南溪公)으로부터 그의 고절(高節)을 들은 바 있었다. 추강(秋江)과 함께 공의 토실에서 뵈었는데, 공은 옛 친구의 어린 자식으로 선생을 대하였으며 오랜 지기와 같이 흉금을 터놓고 문답하였다. 병정사(丙丁事 : 즉 병자년(1456년)의 死六臣의 上王복위 모의사건과 정축년(1457년)의 魯山君(단종) 사망사건)에 관한 말씀은 매우 상세하였다.
送至溪口詠其平日所作歎世詞以餞之有曰嗟夷齊邈焉寡儔兮空摘翠於首陽世皆志義循祿兮我獨潔身而佯徉
송별할 때 계곡 입구에 이르러 평소에 지은 바 「탄세사(歎世詞)」를 읊어주어 전별했다.
嗟夷齊邈焉寡儔兮(아! 백이숙제 아득히 머니 벗할 이 드물구나)
空摘翠於首陽(부질없이 수양산에서 푸른 것만 따는 도다)
世皆志義循祿兮(세상이 다 의리를 잊고 녹봉을 좇아도)
我獨潔身而徜佯(나홀로 몸 깨끗이 하고 노닐리다.)
盖公之心跡示先生者如此先生與秋江皆和之{詞見文集一卷}
대체로 공의 심경을 선생 등에게 토로한 것이 이와 같았다. 선생과 추강(秋江) 모두 이에 화답(和答)하였다.(문집 6권 참조)
○十八年壬寅{先生十九歲}
1482년 임인 (성종 13년) 선생 19세
冬十月庚辰從東窓梅軒二公赴庭試稱疾徑出
<1482년>겨울 10월 경진(15일) : 동창(東窓), 매헌(梅軒) 두 형을 따라 정시(庭試)에 나갔으나 병을 칭탁하여 곧바로 나오다.
是日 上御勤政殿發策試士先生欲於狀頭讓於二兄稱病不對而出及其坼號梅軒公果占魁元東窓公居第二 上特命以兄弟之序定甲乙次盖先生心知已若呈券必取壯元而掩諸兄之名故初不製進少無奔競之心而有謙讓之德人以爲難
이날 주상이 근정전에 나와 시무책(時務策)에 관한 문제를 내어 선비들을 시험 보았는데, 선생은 장원급제를 두 형에게 양보하고자 병을 칭탁하여 시험을 보지 않고 그 곳을 빠져나왔다. 그래서 결국 매헌공(梅軒公)이 장원을 차지하고 동창공(東窓公)이 둘째로 급제하게 되었다. 주상이 특명을 내려 형제의 서열대로 갑을(甲乙)의 순서를 정하게 했다.
아마 선생은 만약 자기가 답안지를 제출하면 반드시 장원을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두 형의 명성을 가리게 된다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답안을 작성하지 아니하며 잠시 경쟁심을 없앰으로써 겸양의 미덕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보통 사람으로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十一月庚戌還雲溪
<1482년> 11월 경술(16일) : 운계에 환향하다.
從二兄應榜後榮覲之行也佔翁作序以送之
두 형을 쫓아왔는데, 과거 급제 절차를 마친 뒤의 영친(榮親 ; 부모를 영광스럽게 함)스러운 귀성이었다. 점옹(佔翁)은 축하의 서문을 지어 보내왔다.
○十九年癸卯{先生 二十歲]
1483년 계묘, (성종 14년, 선생 20세)
春二月戊寅如密陽謁金先生
<1483년>봄 2월 : 밀양에 가서 김(金)선생을 뵙다.
時佔畢先生辭弘文館直提學歸密陽先生往謁受敎四月始還
그 당시 점필재(佔畢齋) 선생은 홍문관 직제학을 사임하고 밀양에 돌아와 있었는데, 선생이 가서 가르침을 받고 4월에 돌아왔다.
秋九月辛丑{十一日}丁南溪公憂
<1483년>가을 9월 신축 {11일} : 남계공(南溪公) 상(喪)을 당하다.
南溪公以太宗永樂八月{我 太宗大王十年}庚寅八月一日生中生員進士登文科癸酉靖難以集賢殿校理棄官歸鄕屢徵不起成宗初始拜吏曺佐郞參佐理原從勳官止司憲府執義至是卒享年七十四
남계공(南溪公)은 1410년 경인(태종 10년) 8월 1일에 출생하여 생원, 진사를 거쳐 문과에 등제하였다. 계유정난 때 집현전 교리로 있다가 관직을 버리고 귀향하였는데, 여러 차례 부름을 받았으나 불기(不起)하다가 성종 초에 비로소 이조좌랑, 참좌리원종훈관(參佐理原從勳官)을 배명하고 사헌부 집의에서 치사(致仕)하였다가 지금에 이르러 향년 74세로 별세하였다.
冬十一月庚戌葬南溪公于水也山乾坐原
<1483년>겨울 11월 경술(21일) : 수야산 건좌에 남계공(南溪公) 장례를 지내다
在淸道上北誌文權睡獻五福撰碑銘洪涵虛亭貴達撰
묘는 청도 상북면에 있으며 지문(誌文)은 수헌(睡軒) 권오복(權五福), 비명은 함허정(涵虛亭) 홍귀달(洪貴達)이 지었다.
○二十年甲辰{先生二十一歲}
1484년 갑진(성종 15년) 선생 21세
○二十一年乙巳{先生二十二歲}
1485년 을사(성종 16년) 선생 22세
冬十二月丁亥服闋
․ 겨울 12월 정해(10일) : 복을 벗다.
○二十二年丙午{先生二十三歲}
1486년 병오 (성종 17년) 선생 23세
春在淸道郡學
<1486년> 봄 : 청도군학(淸道郡學)이 되다.
郡守李鈞以先生文學高明言行峻正請爲學師敎授諸生因重修校宮五月功告訖先生記文{記文文集三卷}
군수 이균(李鈞)이 선생의 문학이 고명하고 언행이 엄정함을 알고 여러 생도를 교수하기 위해 학사(學師)로 초청하였다. 5월에 교궁(校宮:鄕校)이 중수됨에 「중수기」를 썼다.(記文은 문집 3권 참조)
秋七月甲子擧嶺南左道監試初試並中兩場
<1486년>가을 7월 갑자(21일) : 영남좌도(嶺南左道) 감시(監試) 초시(初試) 양장(兩場)에 합격하다.
初場賦第一人終場疑第三人
초장 부(賦)에서는 제 1인, 종장 의(疑)에서는 제 3인으로 합격하였다.
八月丁酉赴覆試中生員進士
<1486년>8월 정유(25일) : 복시(覆試)에서 생원, 진사에 합격하다.
生員第一人進士第二人
생원은 제 1인, 진사는 제 2인으로 합격하였다.
九月壬戌放榜癸亥謝 恩甲子謁 先聖
<1486년>9월 임술(20일) : 생원, 진사 합격 증서를 받고 계해(21일)에 사은(謝恩)한 후 갑자(22일)에 선성(先聖 ; 文廟의 聖賢)을 배알하다.
戊辰中式年庭試文科初試連魁三場
<1486년>9월 무진(26일) : 식년(式年) 정시(庭試) 문과(文科) 초시(初試) 3장(場)에 연달아 수석으로 합격하다.
冬十月丙戌赴覆試對中興策中第一名{策見文集五卷}
<1486년>겨울 10월 병술(15일) ; 복시(覆試) 대중흥책(對中興策)에서 제 1명으로 합격하다.{중흥책 문집 5권 참조}
考官徐四佳居正謂人曰今榜壯元金某必非常人也聽其言森嚴如秋霜見其文汪洋如大海吾爲朝廷得人矣
고시관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이번 방(榜)에서 장원한 김모는 틀림없이 비상한 인물이다. 그의 언론을 들으면 추상같이 삼엄하고 그의 문장을 보면 대해(大海)와 같이 왕양(汪洋 ; 문장의 기세가 좋고 큰 모양) 하다. 우리는 이제 조정을 위해 인물을 얻었다.” 고 했다.
庚子又赴殿試應製親賢遠奸箴
<1486년>10월 경자(29일) : 전시(殿試)에 나아가 「친현원간잠(親賢遠奸箴)」 ; 어진 이를 가까이 하고 간신배를 멀리해야 한다는 경계의 뜻을 펴는 글)을 지어 올리다.
十一月甲子放榜賜甲科第二人及出身
<1486년>11월 갑자(23일) : 갑과(甲科) 제 2인으로 급제, 증서를 받고 출신(出身)하다.
先生於覆試初場醉眠曵白而歸中場亦如之至終場盡粘三場試券連數十幅而入考官問策以中興爲目而宋高宗爲焉
선생은 복시(覆試) 초장에서 술에 취해 졸다가 답안을 한 글자도 쓰지 못하고 백지를 가지고 돌아왔는데 중장에 와서도 역시 그러했다. 종장에 이르러 삼장(三場)의 시권(試券 ; 시험 답안지) 수십 폭을 모두 풀로 붙여 고시관의 문책(問策;試問)에 들어갔다. 중흥책(中興策)을 제목으로 하였는데 송나라 고종이 문제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先生卷其題詰前曰宋高宗忘親釋仇稱臣於戎狄曾犬羊之不如豈敢與夏康周宣屛齒於中興之列哉考官大慚改其句語如先生言乘半酣揮灑日未午矣榜將揭使人往視曰上頭第一名非d我勿復觀及往視之果第一也
선생은 그 시제(詩題)를 말면서 앞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송 고종은 어버이 일을 잊고 원수를 석방하였으며 오랑캐에게 신하로 굴복(稱臣)하였으니 짐승만도 못합니다. 어찌 감히 하나라의 소강제(小康帝)나 주나라의 선왕(宣王)과 나란히 중흥의 반열에 끼어 넣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다. 고시관은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고 선생 말씀대로 고쳤다, 선생은 약간 얼근한 술기운을 타고 일사천리로 답안을 써내려가 해가 아직 오시(午時)가 되기 전에 다 끝냈다.
방(榜)이 붙자 사람을 시켜 가보고 오라며 맨 위의 제 1등이 내가 아니면 나머지는 다시 볼 것도 없다 하였다. 가서 보니 과연 제 1등에 있었다.
先生雖能文章每屈已而伸兩兄兩兄俱登科然後自占壯元自鄕解至大闡數月之間連魁六場名聲籍甚及殿試考官忌之置第二先生嘗以東坡之居第二自况焉
선생은 비록 문장에 능했지만 매번 자기의 사심(私心)과 욕심을 버리고 두 형들이 펼 수 있도록 하여 두 형 모두 등과한 연후에 스스로 장원을 차지한 것이다. 향시(鄕試)로부터 문과급제(大闡;대천)에 이르기까지 수개월 사이에 연달아 6장(場)에 수석을 차지했으니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런데 전시(殿試)에 이르러 고시관이 시기하여 둘째의 자리에 내려놓았다.
선생은 소동파(蘇東坡 ; 송대 제일의 시인, 당송 8대가의 한 사람)의 제 2위 한 것과 자기의 상황을 비유하여 말한 적이 있다.
秋江賀之以詩曰吾師推許孰如君日月名高吏部文老御李君踰素分羞將布鼓入雷門淸朝榜眼韓忠獻市上兒童誦姓名弘業大功從此始金甌愼勿汚光明天生豪傑萬人先莫邪神光射斗邊文藻已看修五鳳心齋須識呂藍田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 시를 지어 축하했다.
吾師推許孰如君(우리 스승 밀어주고 허락할 이 그대 말고 누구인고)
日月名高吏部文(일월같이 높은 명성 이부(韓愈)의 문장이네)
老御李君踰素分(늙어서 어진 그대를 공경하고 따를 주제도 못되니)
羞將布鼓入雷門(포고 지고 뇌문에 들어가는 부끄러움일세)[8]
淸朝榜眼韓忠獻(맑은 조정 한충헌[9]은 제2명 급제했어도)
市上兒童誦姓名(길거리 아이들도 그의 성명 외웠네)
弘業大功從此始(왕업을 크게 펴는 큰 공 이에서 비롯되느니)
金甌愼勿汚光明(금단지[10]는 더럽히지 말고 광명을 내야 하리)
天生豪傑萬人先(하늘이 내신 호걸 만인에 앞서니)
莫邪神光射斗邊(막사(神劍)의 신령한 빛이 북두변을 비추네)
文藻已看修五鳳(그대 문채 이미 오봉을 보고 닦았으니)
心齋須識呂藍田(모름지기 마음으로 여람전[11]을 새겨둘지어다)
[8]“布鼓毋過雷門”에서 온 말, 즉 會稽城門(회계성문)인 雷門에 설치된 북은 소리가 커서 온 洛陽에 들릴 만한데 소리가 없는 베로 만든 布鼓를 가지고 雷門을 지나면 웃음거리가 되어 부끄럽다는 뜻.
[9]한충헌(韓忠獻) ; ?
[10]금단지는 영토와 주권의 완전하고 견고함을 비유하는 말.
[11]呂藍田은 宋나라 呂大鈞, 呂氏鄕約(自治規範)을 처음으로 실시한 사람.
○秋江以出塵淸風盖世豪氣平生少許可於人而尙稱先生之學術似董廣川文章似韓昌黎才識似蔡西山德器似韓魏公氣節似李龍門實行似呂藍田故其推詡期待之盛見於賀詩者如次云
추강(秋江)은 세속을 벗어난 그의 청아한 풍격과 세상을 압도할 만한 호방한 그의 기상 때문에 평생 다른 사람을 용납하는 경우가 적었다. 그런 그가 항상 칭찬하기를, “선생의 학술은 동광천(董廣川) 같고 문장은 한창려(韓昌黎), 재식(才識)은 채서산(蔡西山), 덕기(德器)는 한위공(韓魏公), 기절(氣節)은 이용문(李龍門), 실행(實行)은 여남전(呂藍田)을 닯았다. 그런고로 그의 앞으로의 진취가 크게 기대된다.” 고 하였다.
위의 하시(賀詩)에서 보는 바도 이와 같다.
○趙靜庵光祖掌詩得宋純對策曰季雲後無此作先生之爲世企慕可見矣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가 고시관을 맡았을 때 송순(宋純)의 대책(對策 : 問策에 대한 답안)을 읽어보고 “계운 이후 이와 같은 작문이 없었다.”고 말했다.
선생이 세상을 위해 꾀하고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己巳分隸承文院授務功郞權知副正者
<1486년>11월 기사(28일) : 승문원[12]에 예속되어 무공랑(務功郞)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제수 받다.
[12] 조선 태조 때 설치한 文書應奉司를 1410년(태종 10년)에 개칭한 것으로 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맡아보던 관청
十二月甲戌陞拜正字兼春秋館記事官
<1486년>12월 갑술(3일) : 정자(正字) 겸 춘추관[13] 기사관에 승진 임명되다.
[13]국가의 時政을 기록하던 관청. 일명 史館이라고도 한다. 領事, 監事, 知事, 同知事, 修撰官, 編修官, 記注官, 記事官 등의 관원을 두었다.
時東窓公登重試陞弘文校理梅軒公爲吏曹佐郞先生拜正字兄弟三人幷居淸選時人榮之謂之金氏三珠
당시 동창공(東窓公)은 중시(重試)에 등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되고 매헌공(梅軒公)은 이조의 좌랑, 그리고 선생은 정자(正字)에 오름으로써 3형제가 나란히 청환(淸宦 : 학식, 문벌이 높은 사람이 하던 홍문과, 예문관, 승문원 등의 벼슬)에 선임되어 일함에 당시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김씨삼주(金氏三珠)”라 했다.
○二十三年 丁未{先生二十四歲}
1487년 정미(성종 18년) 선생 24세
春正月甲子移拜弘文館正字兼 經筵典經春秋館記事官
<1487년>봄 1월 갑자(23일) : 홍문관[14] 정자(正字) 겸 경연[15]전경(典經), 춘추관 기사관으로 옮겨 보임되다.
[14]조선시대 3司의 하나, 經籍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광청. 일명 玉堂이라고도 하여 젊은 학자들이 추앙하던 곳으로 이 관청의 2품 이상의 官은 經筵官을 겸하였다. 성종은 세종 때의 집현전을 본받아 學士의 대우를 극진히 하였다. 官職은 領事, 大提學, 提學, 副提學, 直提學, 典翰, 應敎, 副應敎, 敎理, 副敎理, 修撰, 副修撰, 博士, 著作, 正字 등이었다.
[15]임금이 학식과 덕망 있는 학자를 불러 학문을 닦기 위해 經書를 강론케 한 일. 경연관에는 領事, 知事, 同 知事, 參贊, 侍讀官, 檢討官, 司經, 說經, 典經 등을 두었는데 대부분 타관과 겸직하였다.
用大提學徐居正薦也方是時 上尊尙儒學作興人材上自朝廷下至鄕黨彬彬多宏博雅飭之士號稱盛際而蔚然爲衆論所推登科未幾躋南床亦可以見先生之夙就也
이 임용은 대제학 서거정(徐居正)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당시 임금은 유학을 숭상하고 인재를 일으켜 위로는 조정에서부터 아래로는 향당(鄕黨)에 이르기까지 문물이 매우 번성했다. 학문이 깊고 넓으며 품행이 방정한 선비로 이름이 나고 자자한 칭찬이 이어져 무성해지면 중론의 미는 바가 되어 등과 후 얼마 안 되어도 곧바로 남상(南床 ; 弘文館 正字의 별칭)에 오를 수 있었는데, 선생이 바로 그러하였으니 가히 선생의 숙취(夙就 : 이른 승진)를 엿볼 수 있다.
三月丙午以親疾上疏辭職請歸覲不 允級由卽日發行辛亥至雲溪
<1487년>3월 병오(6일) : 모친 병환으로 사직하고 귀근(歸覲: 고향에 돌아가 부모를 뵙는 것)할 것을 소(疏)를 올려 청하였으나 윤허되지 않고 말미가 주어져 즉일로 출발. 신해일에 운계에 도착하였다.
夏四月丁亥十七日安人禹氏卒
<1487년>여름 4월 정해 17일[1] : 안인(安人) 우(禹)씨 별세하다.
[1]18일 임, 17일은 일본 간지에 의한 것, 일본간지와 중국간지 및 우리나라 간지가 다른 경우가 종종 있다. 만일 연보의 초본 작성시기가 조선초기라면 중국간지로 보아야 한다.
安人以天順六年壬午三月八日生至是卒年二十六夫人仁孝慈諒甚得舅姑心年未三十而夭鄕隣宗黨莫不嗟惜
안인(安人 ; 7품관 부인 칭호) 우씨는 1462년 임오(세조 8년) 3월 8일에 출생, 지금에 이르러 별세하니 향년 26세이다. 부인은 매우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인자하고 성실하여 시부모의 사랑을 받았었는데 연세 30 미만에 요절하니 향리 일가친척들과 이웃들이 통탄하고 애석해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五月壬寅有 旨以本職乘馹赴 召
<1487년>5월 임인(3일) : 본직에 복귀하라는 교지가 내려 역마를 타고 부임하였다.
六月丙子以亡妻歸葬辭不 允級由
<1487년> 6월 병자(8일) : 망처(亡妻) 귀장(歸葬)을 위해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말미가 주어졌다.
辛卯葬禹安人于蘿葍山寅坐原
<1487년> 6월 신묘(23일) : 안인 우씨를 나복산 인좌(寅坐)에 장사 지내다.
在淸道上北豊角界卽節孝公兆下也
장지는 청도 상북면과 풍각면의 경계, 즉 절효 선생 묘 아래이다.
己亥承 召還京師又疏辭不 允
<1487년 7월> 기해(2일) : 부름을 받아 서울에 돌아와 다시 사직 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다.
秋八月乙酉訪秋江于杏州偕往坡平之南谷謁文斗成先生因遊圻右名山閱旬而還
<1487년>가을 8월 을유(18일) : 행주(杏州)에 있는 추강(秋江)을 방문, 함께 파평(坡平) 남곡(南谷)에 가서 문두(文斗) 성(成)선생을 뵙고 인하여 지경 오른쪽에 있는 명산을 유람하고 열흘이 지나 돌아오다.
文斗名聃壽字耳叟集賢校理熺之子丙子熺從父兄子三問謀復 魯山坐竄金海意以忠憤沒世歸葬坡州文斗因居墓下深自韜晦與世相絶不出戶外貞心亮節克紹前烈先生與秋江往訪至其門草屋肅然不蔽風雨土床無席殆難容膝佣酒壺持釣竿引先生遊長浦江上有唱酬詩時公年五十一先生有紀行錄
문두(文斗)선생의 이름은 담수(聃壽)[16]요 자는 이수(耳叟)인데, 집현전 교리 성희(成熺)의 아들이다. 병자년(세조 2년) 성희는 친척인 성삼문(成三門) 등의 노산군(魯山君) 복위 모의 사건에 연좌되어 김해에 귀양 갔다가 마침내 충분(忠憤)을 이기지 못하고 별세하였다. 그 후 파주(坡州)에 귀장(歸葬)하였는데, 그 묘 아래 문두 선생이 거처하게 된 것이다.
문두 선생은 스스로 깊숙이 은둔(韜晦)하며 세상과 인연을 끊고 문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곧은 마음(貞心)과 맑은 절개(亮節)는 능히 전열(前烈 ; 先代의 忠烈)을 이을 만했다. 선생과 추강이 방문해서 그 문 앞에 이르니, 쓸쓸한 초옥(草屋)은 비바람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흙바닥에 자리도 없어 한 몸 용신(容身)하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술병을 차고 낚싯대를 들고 선생을 인도하여 장포강상(長浦江上)에서 유람하면서 서로 시창(詩唱)을 주고받았다.
이때 공의 나이는 51세였다. 선생은 이때의 기행록을 써서 남겼다.
[16] 生六臣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고 있다.
九月庚午上疏乞養壬申拜晋州牧學敎授
<1487년> 9월 경오(10월4일?) : 상소하여 걸양(乞養 : 부모 봉양을 위해 외직을 청하는 것)하였는데, 임신일(10월 6일?)에 진주목학(晋州牧學) 교리(敎理)로 임명되다.
時年春梅軒公以夏官佐郞乞養爲昌寧縣監先生亦爲便養求外 國制牧以上學敎授以文臣有淸望者擇差故有是 命
이 해 봄에 매헌공이 병조좌랑으로 있다가 걸양하여 창녕현감(昌寧縣監)을 하고 있었는데, 선생 역시 봉양의 편의를 위해 외직을 주청하였던 것이다.
국법에 정하기를 목(牧) 이상의 문신 중 청렴하고 덕망이 있는 사람을 선발하여 학교수(學敎授)로 보내게 되어 있었다.
乙亥謝 恩己卯辭 朝乙酉過金山郡訪曹太虛于鳳溪鄕廬
<1487년>을해일(10월9일?)에 사은하고 기묘일(10월 13일?) 조정에 고별하고, 을유일(10월19일?)에 금산군(金山郡)을 지나다가 봉계(鳳溪)의 고향집에 있는 조태허(曺太虛)를 방문하다.
太虛名偉號梅溪佔翁婦弟也受業于佔翁能文學有志節先生常兄事之時以直提學上疏論權倖忤 旨棄官歸家已數月矣先生過而拜之夜講爲學事君之方達曉而別
조태허(曺太虛)의 이름은 위(偉)요 호는 매계(梅溪), 점필재(佔畢齋)의 처남 되는 사람으로 점옹(佔翁)에게 수업을 하였는데, 문학에 능하고 지절(志節)이 있는 사람이다.
선생은 항상 형으로 받들었는데, 이때 공은 직제학으로 상소하여 권세 있고 임금의 총애를 독차지한 사람(權倖)을 논박함으로써 임금의 뜻을 거슬러 벼슬을 버리고 귀향한 지 이미 수개월이 되었다.
선생이 이곳을 지나면서 찾아뵙고 학문을 위하여 임금을 섬기는 방법에 대하여 강론(講論)하고 새벽에 떠났다.
丁亥至昌寧覲母夫人
<1487년>정해일(10월 21일?) : 창녕에 이르러 모부인을 뵙다.
冬十月戊戌到晋州學
<1487년> 겨울 10월 무술(?) : 진주학(晋州學)에 도착하다.
先生旣莅任身卛諸生規矩必嚴禮制必明勉以義理開以誠修講問之方盡敎導之責
선생은 이미 소임에 임하였는데, 몸소 많은 유생을 통솔하면서 일상 생활에서 지켜야 할 법도는 반드시 엄하게 하고, 예법은 반드시 명확하게 하고, 의리에 힘쓰고, 성경(誠敬;存誠과 居敬)을 깨우치게 하고, 학문(學問)을 강문(講問)하는 방법을 체득케 하여 교도(敎導)의 책무를 다하였다.
其讀書次第一遵朱子成規先讀小學次讀大學論語孟子中庸以至於詩書易春秋學者翕然從之寒喧曰季雲莅學甚得敎授之本
독서의 순서는 주자가 정한 규칙(朱子成規)에 따르도록 하여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논어』『맹자』『중용』을 읽은 다음 『시』『서』『춘추』에 이르도록 하였다. 이에 학자들은 모두 하나 같이 순응해 따랐다.
한훤당(寒暄堂)이 말하기를, “계운은 교수(敎授)하는 근본을 깊이 체득하여 교학(敎學)에 임했다.”고 하였다.
○孝宗皇帝弘治元年戊申{先生二十五歲}
1488년 무신 (성종 19년) 선생 25세
春三月丁卯與牧使慶太素及遊宦諸公二十有一人修稧于矗石樓有序{序見文集二卷}
<1488년> 봄 3月 정묘(3일) : 진주목사(晋州牧使) 경태소(慶太素公)을 비롯한 관리 등 21인이 더 불어 촉석루에서 수계(修稧)하였는데, 선생이 그 서문을 지었다. (문집 2권, 『속동문선(續東文選)』16권 참조)
己卯如咸陽之藍溪訪鄭伯勖
<1488년 3월> 기묘일(15일) : 함양 남계에 가서 정백욱공(鄭伯勖公)을 방문하다.
伯勖名汝昌號一蠹子嘗入頭流山讀書三年不出遂通性理學先生許以道義之交至是往訪講大學三日而還晋陽
백욱(伯勖)의 이름은 여창(汝昌)이요 호는 일두자(一蠹子)인데, 일찍이 두류산(頭流山 ; 智異山)에 들어가 3년 동안 불출 독서에 전념하여 성리학에 통달한 분이다.
선생과는 도의의 교유를 해왔는데, 이번 방문에서도 3일간 『대학』을 강(講)하고 진양에 귀환하였다.
○先生與寒喧堂書言與一蠹講學之事因稱一蠹所見漸就平實吾輩中一人耳以此觀之二先生之從遊切偲深相契許者略可知矣
선생이 한훤당(寒暄堂)에게 보낸 서신에서 일두(一蠹)와 강학(講學)한 일을 말하고, 인하여 일두(一蠹)를 칭찬하기를 “(학문이)점진적으로 고루 충실하게 성취되어 가는 사람은 우리 무리 중 이 한 사람뿐이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건대 두 선생의 교유에서 서로 권면하고 격려함이 절실하였고 뜻이 계합(契合)하였다는 것을 대략 알 수 있다.
秋七月乙丑上疏辭學職翌日發行
<1488년>가을 7월 을축(4일): 상소하여 학직(學職)을 사임하고 다음 날 떠나다.
時梅軒公殿縣而歸先生亦移病棄官
당시 매헌공은 고을 치적이 불량(殿縣)하다 하여 고향에 돌아와 있었고 선생은 병을 칭탁, 관직을 버렸다.
戊辰省祖墓于金海儲福山<淸道譜追錄>
<1488년 7월> 무진일(7일) : 김해 저복산(儲福山)에 있는 조묘(祖墓)를 성묘하다. <추록>
辛未爲文祭始祖王陵丁丑還雲溪
<1488년 7월>신미일(10일) : 제문을 지어 시조 왕릉에 제사 지내고 정축일(16일) 운계에 귀환하다.
金海本駕洛之墟始祖首露王開國於漢光武建武壬寅在位一百五十八年享年一百六十八葬納陵在今府西三百步王以天降聖神旣登寶位政尙仁義德化大行農者讓耕行者讓路
김해는 본래 가락(駕洛)의 옛터로서 시조 수로왕은 이곳에서 서기 42년 임인에 개국하여 158년간 재위하였고, 168년을 향수(享壽)하였으며 김해부 서쪽 300보 지점에 있는 납릉(納陵)에 모셨다.
왕은 하늘이 내린 성신으로서 보위에 올라 나라를 다스렸는데, 인의를 숭상하고 덕화(德化)를 크게 행하여 농자(農者)는 경작을 서로 양보하고 행자(行者)는 길을 서로 사양하였다 한다.
聘許后以正婚姻立元子以正嫡統封五王以正宗支建九干以正官方斯羅十濟十濟沙伐萇山登數十小國皆來朝獻奄有辰弁兩韓之地
바른 혼인으로서 허후(許后)를 맞아들였고 바른 적통으로서 원자(元子)를 세웠으며 바른 종파와 지파로서 오왕(五王)을 봉하였고, 바른 관원으로서 구간을 세웠다. 사라 십제(斯羅, 十濟) 지방의 사벌(沙伐), 장산(萇山) 등 수십 소국이 모두 와서 조공을 바쳤으며 진변(辰弁) 양한(兩韓)의 땅을 전부 차지하고 있었다.
誠檀箕後首出之聖君東海上一大國也然是東方人文未開國無敦史盛德仁政泯而不傳可歎
실로 단군과 기자 이후 가장 뛰어난 성군으로서 해동에서 제일가는 대국이었다. 그러나 당시 동방의 인문이 미개하여 두터운 사기(史記)를 남기지 못하여 성덕(聖德)과 인정(仁政)이 민멸(泯滅)하고 전하지 못하였으니 통탄할 일이다.
○先生旣省墓于儲福因至陵下操文具奠以祭所以爲母夫人祈壽也{祭文見文集四卷}
선생은 이미 저복산(儲福山)에서 성묘를 하고 김해 왕릉하에 이르러 제문을 짓고 제수를 갖추어 제향하면서 모부인의 수(壽)를 기원하였다. (제문은 문집4권 참조)
八月丙申南伯恭洪餘慶禹子容來訪同遊雲門己酉還雲溪留與講參同契三日而別
<1488년> 8월 병신(5일) : 남백공(南伯恭), 홍여경(洪餘慶), 우자용(禹子容) 등이 내방하여 운문산을 유람하고 기유일에 운계에 돌아와 같이 유(留)하면서 학문을 강(講)하는 등 3일 동안 사귀고 헤어지다.
伯恭秋江字名孝溫餘慶名裕孫號篠叢以南南陽貢生中進士受業於佔翁佔翁曰此子已見顔子所樂處放達不檢雲遊物外玩世高韜不干榮利
백공(伯恭)은 추강(秋江)의 자(字), 이름은 효온(孝溫)이고, 여경(餘慶)의 이름은 유손(裕孫) 호는 소총(篠叢)인데, 남양공생(南陽貢生)으로 진사에 합격한 분이다. 역시 점옹(佔翁)한테서 수업하였는데, 점옹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이미 안자(顔子)가 즐기던 곳을 본 것 같다. 아무 구애․ 구속받음이 없이 물질적 세계를 떠나 자유로이 방랑하며 세상일을 경시하고 도도하며 영리(榮利)에 개의하지 않는 사람이다.” 라고 했다.
先生與伯恭子容皆其神交也伯恭嘗稱餘慶如漆園詩涉山谷材挾孔明行類曼債眞異人也
선생과 백공과 자용은 다 같이 그와 신교(神交)를 맺어왔다. 백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여경의 글은 칠원(漆園 ; 莊子)과 같고 시는 섭산곡(涉山谷), 숨긴 재주는 공명(孔明), 행위는 유만(類曼) 같아 참으로 이인(異人)이다.”라고 했다.
子容名善言號楓崖倜儻有志氣喜文學辛丑謁佔翁於孝廬後中進士隱居不仕嘗喜從伯恭遊至是同伴來訪因與往遊雲門
자용(子容)의 이름은 선언(善言)이요 호는 풍애(楓崖)인데, 뜻이 크고 지조와 기개가 있으며 문학을 즐겨하였다. 신축년 효려 (孝廬 : 집상 중 거처하는 곳)에서 점옹(佔翁)을 뵈온 후로 진사에 합격했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하며 항상 백공(伯恭)을 좇아 유람하기를 좋아했는데, 이번에도 함께 내방하여 운문산을 같이 유람하게 된 것이다.
雲門在雲溪東百里山氣峻拔明秀盤據數郡之界洞堅?深幽多奇巖澄淵之勝有紀行錄
운문산은 운계(雲溪)에서 동쪽 100리에 있는데, 산의 기운이 준엄하고 아름다움이 빼어나며 그 터전이 여러 군의 경계에 걸쳐 있고, 그 골짜기는 깊고 그윽하며 기암과 맑은 못이 많은 절경지이다. 그때의 기행록이 남아 있다.
九月壬申雲溪精舍成
<1488년> 9月 임신(12일) : 운계정사가 완공되다.
先生自晋州學歸卜築于舊宅之東臥龍峰下至是成扁其外軒曰雲溪精舍小樓曰詠歸李慵軒仲鈞書之
선생이 진주목학(晋州牧學)에서 돌아온 후 옛집 동쪽 와룡봉(臥龍峯) 밑에 새로 터를 잡아 지었는데, 준공에 이르자 외헌(外軒)의 편액(扁額)을 ‘운계정사(雲溪精舍)’라 하고 소루(小樓)는 ‘영귀루(詠歸樓)[17]라 하였는데, 용헌(慵軒) 이중균(李仲鈞)이 썼다.
[17] 영귀(詠歸)란 교외의 풍경을 완상하고 시를 읊으며 돌아온다는 말로 ‘풍류를 즐김’을 이름.
築臺于舍之東麓刻以書曰濯纓鑿方塘于臺前引溪水經樓下以滙之曰天雲潭名其引水曰活水刻小石立于樓前先生自書有精舍上樑文及樓記臺記
또 집 동쪽 기슭에 대(臺)를 축조하여 ‘탁영대(濯纓臺)’라 써서 새기고 대 앞에 네모난 연못을 파서 냇물을 끌어와 누각 밑으로 흘러가 모이게 하였는데 ‘청운담(天雲潭)’이라고 하였다. 끌어온 물은 ‘활수(活水)’라 하고 작은 돌에 새겨 누각 앞에 세웠다.
선생이 손수 쓴 정사(精舍) 상량문과 누기(樓記), 대기(臺記)가 남아 있다.
○二年己酉{先生二十六歲}
1489년 기유 (성종 20년) 선생 26세
春二月丁巳一蠹來訪約觀頭流山留三日而別
<1489년>봄 2월 정사(29일) : 정일두공(鄭一蠹公)이 내방하여 두류산(頭流山) 유람을 약속하고 3일간 묵은 다음 돌아가다.
三月癸酉除宣敎郞藝文館檢閱兼 經筵典經春秋館記事官有 旨促召辭不就
<1489년> 3월 계유(15일) : 선교랑, 예문관[18] 검열 겸 경연의 전경,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고 독촉하는 교지가 있었으나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8] 조선시대 임금의 칙령(勅令)과 교령(敎令)을 기록하던 관청. 제학(提學)이상은 타관으로 겸임했다. 관원은 領事, 大提學, 提學, 直提學, 應敎 각 1명, 奉敎, 待敎 각 2명, 檢閱 4명을 두었다.
用翰林趙之瑞申從濩等薦也
이는 한림(翰林 : 예문관 검열의 별칭) 조지서(趙之瑞)와 신종호(申從濩) 등의 추천에 의한 것이었다.
夏四月己亥如咸陽謁嶺伯金殷卿
<1489년> 여름 4월 기해(11일) : 함양에 가서 영남도백(嶺南道伯) 김은경(金殷卿) 을 뵙다.
金公素與先生善旣按本道屢書相邀期而未赴適巡部向天嶺追其行見之
김공은 평소 선생과 친한 사이여서 본도(本道)를 안찰한 후 누차 서로 만나기를 기약하는 서신이 있었으나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마침 순찰 일행이 천령(天嶺 ; 咸陽)을 향하고 있어서 그 일행을 뒤쫓아가 만났다.
庚子藍溪訪一蠹
<1489년 4월> 경자일(12일) : 남계(藍溪)에 가서 일두(一蠹,정여창1450)∼1504)를 방문하다.
壬寅偕一蠹遊頭流
<1489년 4월> 임인일(14일) : 일두(一蠹)와 함께 두류산(頭流山) 유람에 나서다.
金公欲與伴行先生以山行有約固辭金公知不可挽贐資以送郡守李箴資行亦厚士人林貞叔從焉有紀行錄{錄見文集五卷}
김공은 자기와 동행하기를 원했으나 선생은 산행 선약으로 이를 고사했다. 김공은 만류할 수 없음을 알고 노자를 준 뒤 송별하였다. 군수 이잠(李箴)도 노자를 후하게 주었으며 선비 임정숙(林貞叔)을 따르게 했다. 이때의 기행록이 남아 있다. (文集 5卷 및 續東文選 21卷 참조)
丁巳至岳陽城乘舟浮江而下
<1489년 4월> 정사일(29일) : 악양성(岳陽城)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 아래로 내려가다.
舟中有唱酬詩先生詩曰滄波萬頃櫓聲柔滿袖淸風却似秋回首更看眞面好閒雲無迹過頭流一蠹詩曰風蒲獵獵弄輕柔四月花開{地名}麥已秋看盡頭流千萬疊孤舟又下大江流觀於此詩二先生造道之氣象槩可見矣
배 안에서 시를 지어 창수(唱酬)하였는데 선생과 일두(一蠹)의 시는 다음과 같다.
“滄波萬頃櫓聲柔(푸른 물결 드넓고 노 젓는 소리 부드러운데)
滿袖淸風却似秋(소매 가득 맑은 바람 도리어 가을같아라)
回首更看眞面好(고개 돌려 다시 보니 그 참모습 아름다운데)
閒雲無跡過頭流(한가한 구름은 자취도 없이 두류봉을 지나가네)”
“風蒲獵獵弄輕柔(바람결에 부들잎 살랑살랑 흔들거리고)
四月花開麥已秋(四月이라 화개 땅엔 보리 이미 익었네)
看盡頭流千萬疊(천만첩 두류산을 모두 구경하고)
孤舟又下大江流(외딴 배로 큰 강 따라 또 내려가네)”
위의 시에서 두 선생의 도에 임하는 기상을 대강 엿볼 수 있다.
五月己未至晋州訪姜士浩
<1489년> 5월 기미(2일) : 진주에 도착, 강사호(姜士浩)를 방문하다.
士浩渾之字號木溪能文章亞於先生時以注書辭還已數日矣同一蠹訪之夜與講詩文
사호(士浩)는 혼(渾)의 자(字)요 호는 목계(木溪)인데 문장에 능하여 선생에 버금갔다. 이때 그는 승정원 주서직을 사임하고 돌아온 지 이미 수일이 되었다.
일두(一蠹)와 같이 방문하여 밤새 더불어 시문을 강론(講論)하였다.
壬戌至密陽謁金先生
<1489년 5월> 임술일(5일) : 밀양에 도착하여 김선생을 뵙다.
是行也歷覽山川講論不撤因與木溪共詰師門時佔畢先生以刑曹判書辭病致仕退臥鄕廬四方來學者益衆遂留受敎旬有五日而歸
이번 여행에서 산천을 두루 관람하고 강론도 거두지 아니하였는데, 그로 인하여 목계(木溪,강사호)도 함께 스승의 집에 가게 되었다. 당시 점필재(佔畢齋) 선생은 병환으로 형조판서를 사직,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집에 누워 있었는데, 사방에서 학자들이 모여들어 그 무리가 더해갔다.
선생 등은 이곳에서 15일간 유숙하며 가르침을 받고 귀환하였다.
戊寅還雲溪己卯餞一蠹至昌寧而別
<1489년 5월> 무인일(21일) : 운계에 귀환, 기묘일(22일)에 일두(一蠹)에게 송별연을 베풀고 창녕에 이르러 헤어지다.
辛巳又承 召
<1489년 5월> 신사일(24일) : 또 임금의 부름(承召)이 있었다.
六月庚寅始拜 命癸巳餞崔倬卿赴玉果任
<1489년> 6월 경인(3일) : 비로소 명령을 받들고(拜命) 계사일(6일)에 옥과현감(玉果縣監)에 부임하는 최탁경(崔倬卿)을 전송하다.
倬卿名漢能文章有節行以憲府監察充正使書狀朝京及還除是縣人咸惜之先生作序慰之因以諷執政者{序見文集二卷}
탁경(倬卿)의 이름은 한(漢)인데 문장에 능하고 절행(節行)이 있었다. 사헌부 감찰로 있다가 정사(正使)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에 다녀온 뒤 이 현감에 제수되었는데 모두들 애석해했다.
선생은 집정자를 풍자하는 서문을 지어 그를 위로했다. (서문은 문집2권 및 『續東文選』16권 참조)
七月庚申以往娶曠職辭不 允給由仍 命挈家上來
<1489년> 7월 경신(4일) : 부인(夫人)을 맞는 일(娶妻)로 직무를 다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사직코자 했으나 윤허되지 않고 휴가가 주어졌고 거듭하여 가족을 거느리고 올라오라는 명령이 내리다.
癸亥再聘夫人禮安金氏于湖西之木川
<1489년 7월> 계해일(7일) : 호서(湖西) 목천(木川)에서 예안 김씨를 재취 부인으로 맞아들이다.
夫人卽新羅敬順王裔孫中郎將輅之後 英陵參奉尾孫之女家在縣東一遠面磻谷里
부인(夫人)은 신라 경순왕의 후예인 중랑장(中郞將) 김로(金輅)의 후손이며 영릉참봉(英陵參奉) 김미손(金尾孫)의 따님이다. 집은 현동(縣東) 일원면 번곡리에 있었다.
壬申還京師乙亥入直翰苑
<1489년 7월> 임신일(16일) : 서울에 귀환하고 을해일(19일) 한원(翰苑 : 예문관)에 입직(入直)하다.
庚辰夜入侍 經筵 宣醞賜燭而歸館
<1489년 7월> 경진일(24일) : 밤 경연에 입시하였다가 어주(御酒)와 초를 하사받고 귀환하다.
是夜 上特命開 經筵于慶會樓夜分撤講賦詩 賜醞盡醉而出已五鼓矣
이날 밤 주상의 특명으로 경회루에서 경연을 열었는데 부시(賦詩)에 대한 계획된 강(講)을 마친 다음 술을 내림에 잔뜩 취하여 물러나오니 이미 오고(五鼓 : 새벽 4시 전후) 때가 되었다.
丙戌上疏辭職因陳戒三事
<1489년 7월> 병술일(30일) :소를 올려 경계해야 할 3개항을 계진(啓陳)하고 인하여 사직을 청하다.
上喜酒頗姬妾數引宗戚射于後苑必設小酌妓樂隨之先生陳疏極諫語甚懇至 上下批嘉納曰金日孫眞愛者也 命加一資
주상은 술을 너무 좋아하고 희첩(姬妾)을 가까이 하였으며 더러는 종척(宗戚)을 불러 후원(後苑)에서 활을 쏘고 그런 다음에는 반드시 주연을 베풀고 기악이 뒤따랐다. 선생은 극간하는 소를 올렸는데, 그 언사가 심히 간곡하고 지극 하였다.
주상은 간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비답(批答 : 신하의 상소에 대한 임금의 대답)을 내리며 말하기를, “김일손은 진실로 나를 아끼는 사람이다.”라 하고 한 품계 올리도록 명했다.
訪朱溪副正深源論治道
․ 주계부정(朱溪副正) 이심원(李深源)을 방문하여 치도(治道)에 대하여 논(論)하다.
深源字伯淵號醒狂孝寧大君之後通經史深於理學剛直好致言先生嘗從有東山問答
심원(深源)의 자는 백연(伯淵)이요 호는 성광(醒狂)으로 호령대군(孝寧大君)의 후예이다. 경사(經史)에 통달하고 성리학이 깊으며 강직하고 감언(敢言)을 좋아했다.
선생은 일찍부터 교유했는데 「동산문답(東山問答)」이 남아있다.
秋八月庚子{十五日}承 命與公卿及兩館諸學士翫月于掌樂院
<1489년> 추 8월 경자(15일) : 임금의 명령에 따라 조정의 공경과 양관의 여러 학사와 더불어 장악원(掌樂院)에서 완월(玩月;달구경)모임을 가지다.
是日 上敎曰稽於天道寒暑均取於月數蟾兎圓古人翫月良有以也我國雖無此豊適値佳節借以君恩選淸凉之地樂太平之象不亦美乎
이날 주상이 말하기를, “천도(天道)를 상고하건대 월수로 보아 한서(寒暑)가 고루 취해졌다. 달이 만월이 되면 옛사람들은 달구경을 즐겨했는데, 이는 참으로 뜻이 있는 일이다. 우리나라에는 이 풍속이 없지만, 마침 가절을 맞았으니 임금의 은혜를 빌어 시원한 곳을 골라 즐긴다면 이 얼마나 태평스러운 형상이며 아름답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因 命政府六曹堂上弘文館藝文館承旨注書翫月于掌樂院 賜酒樂先生以翰林與焉
인하여 명하기를 정부 육조의 당상관, 홍문관 및 예문관원, 승지, 주서 등으로 하여금 장악원에서 달을 완상하게 하고 술과 주악을 내려 즐기게 하였다.
선생은 한림(翰林 : 예문관 검열)으로서 여기에 참여하였다.
丙午又承 命與宗戚文武二品以上及兩館政院會宴于北所
<1489년 8월> 병오일(21일) : 또 명을 받들어 이곳에서 종척(宗戚), 문무 이품 이상 대신, 양관(兩館), 정원(政院)의 사람들이 회연(會宴)하다.
是日 上進宴兩 慈殿於後苑內外命婦咸與焉 復召宗親領敦寧以上政府六曹參判以上忠勳府漢城府儀賓府堂上政院弘文館藝文館都摠管俱會北所 賜酒樂仍 命射帿投壺又下 御書內賜珍饌盡醉揷花而歸
이날 주상은 후원에서 두 자전(慈殿)에게 잔치를 베풀어 올렸는데 내외명부 모두 참석했다. 그런데 다시 돈녕부 영사 이상의 종친, 정부 육조의 참판이상, 충훈부, 한성부, 의빈부의 당상관, 정원, 홍문관, 예문관 관원, 도총관 등을 불렀고 모두 함께 이곳 모임에 참석했다.
술과 음악이 내려지고 거듭 명하여 활쏘기와 투호(投壺 : 화살을 병속에 던져 넣는 놀이)를 하게 하였다. 또 어서를 내리고 진찬을 하사하여 모두 흠뻑 취하였으며 꽃을 꽂고 돌아왔다.
戊申入侍 經筵與李冑奏史官記事之規
<1489년 8월> 무신일(23일) : 이주(李冑)와 더불어 경연에 입시하여 사관이 기사하는 규범에 대하여 주청하다.
上頻御筵每請訖 命諸講官問答論難以及於時政得失誠盛德事也是日先生以翰林冑之以史官入侍同奏言史貴記實以古史考之有曰勃然變色曰聲色俱厲曰容貌自若史官若不見容色何由記之如是
주상은 자주 경연에 임석하고 강(講)이 끝날 때마다 여러 강관으로 하여금 시정의 득실에 이르기까지 문답하고 논란하게 하였다. 참으로 성덕 스르운 일이었다.
이날 선생은 한림, 이주(李冑)는 사관으로서 입시하여 함께 아뢰기를, “국사는 귀중한 것이므로 그 기록은 충실해야합니다. 고사를 살펴보면 ‘발끈 성내어 안색이 변하였다.’, ‘음성과 안색이 모두 험악했다.’ 또는 ‘용모가 태연자약했다.’ 등의 표현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관이 만약 안색을 보지 못한다면 무슨 근거로 이와 같이 기술할 수 있겠습니까?
中朝史官秉筆立帝之左右我 國史官伏而記事臣等竊以爲不可 上命自今史官坐而記事
중국 조정에서는 사관들이 붓을 잡고 황제 좌우에 서서 기록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사관이 엎드려서 기사합니다. 신 등이 가만히 생각하건대 이는 불가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라고 했다. 이에 주상은 명하여 “지금부터 사관은 앉아서 기사하라.”라고 하였다.
九月庚申上 箚陳治道因以親疾辭不 允給由歸濩
<1489년> 9월 경신(5일) : 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의 상소문)로 주상에게 치도(治道)에 대하여 진언하고 인하여 모친 병환을 이유로 사직코자 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고 휴가가 주어져 돌아가 간호하다.
先生見 上聖智天縱雅好文學尊賢納諫可興至治遂陳治道十二事曰勸學問曰節嗜欲曰簡辭命曰嚴宮禁曰納諫諍曰擧遺逸曰辨忠奸曰興學校曰正風俗曰闢異端曰擇司牧曰恤民隱
선생이 주상을 보니 천성적으로 성지(聖智)가 총명하고 문학을 좋아하며 어진 이를 존대하고 간언을 받아들이니 지극히 잘 다스려진 세상으로 부흥시킬 수 있을 것 같아 마침내 다음의 치도(治道) 12조항을 진언했다.
제목만 간추리면
․ 학문을 권장할 것(勸學問)
․ 기호(嗜好)와 욕망을 절제할 것(節嗜欲)
․ 관직 임명을 대범하게 할 것(簡辭命)
․ 궁중을 엄하게 다스릴 것(嚴宮禁)
․ 간쟁을 수납할 것(納諫諍)
․ 버려진 유능한 사람을 등용할 것(擧遺逸)
․ 충신(忠臣)과 간신(奸臣)을 분별할 것(辨忠奸)
․ 학교(學校)를 일으킬 것(興學校)
․ 풍속을 바르게 할 것(正風俗)
․ 이단을 물리칠 것(闢異端)
․ 목민관(牧民官)은 가려서 뽑을 것(擇司牧)
․ 민생고를 구휼할 것(恤民隱) 등인데,
凡五千餘言語多切直深中時弊上手批褒美曰以若新進少年達治體識時務乃能知是予深嘉悅特 賜表裏以旌爾昌言聞有親病爾其勿辭斯速往濩
무릇 5천여 단어의 글 속에는 뿌리 깊은 시폐를 바로 잡으려는 말씀이 많았다.
주상은 친히 비답하면서 칭송하여 말하기를, “너는 신진으로 아직 연소한데 세상 다스리는 방법(治體)에 통달하고 시무에 대하여 알기를 이와 같이 능하니 나는 심히 기쁘도다. 너의 창언(도움이 되는 좋은 말)에 대한 포상의 표시로 표리(表裏 : 겉 옷감과 안감)를 특별히 하사하노라.
내 들으니 친병(親病)이 있다 하니 너는 사직하지 말고 지금 곧 속히 가서 양호하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秋江嘗曰季雲眞希世之才廟堂之器疏章劄子汪洋如長江大海論議國事是非人物如靑天白日朋友中第一人也先生立朝九年前後疏箚不知爲幾千萬言而盡入禍燼泯沒不傳可勝惜哉今以見聞所及僅錄其大綱焉
추강(秋江,남효온1454~1492)이 일찍이 말하기를, “계운은 참으로 세상에 드문 재사(才士)요 정승의 그릇(廟堂之器)이다. 국사를 논의하고 인물의 시비를 논할 때는 마치 청천백일과 같이 밝도다. 붕우 가운데 제일인이로다.”라고 하였다.
선생은 입조한 지 9년 남짓 동안 울린 소(疏)와 차자(箚子)는 부지기수요 몇 천만언(千萬言) 이었는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화를 입어 거의 다 불타 없어지고 전하지 못하니 이 애석함을 어찌 감당할꼬!
지금 견문에 이거하여 근근이 기록에 올리는 것은 그 대강에 지나지 않는다.
癸未有 旨以檢閱加承訓郞兼弘文館正字又以親疾辭不 允
<1489년 9월> 계미일(28일) : 예문관 검열로써 승훈랑이 더해지고 홍문관 정자를 겸하도록 교지가 내렸는데 또 친병을 이유로 고사했으나 허락되지 않다.
冬十月丁亥被劾幽金寧甲辰蒙 恩放還田里
<1489년> 겨울 10월 정해(3일) : 탄핵을 받아 금녕(金寧;김해)에 유폐되었으나 갑진일(20일)에 왕은(王恩)을 입어 방면, 고향집으로 귀환하다.
時有當塗者忌先生名盛嗾掌令李承健托以抑奔競誣彈先生以恃才慢君鈞名要寵等數事 上曰予知此人之忠直其有是事然重違臺論削職因金寧{卽金海}未幾 上察其非罪特 命放歸田里
당시 요로에 있는 권세 가진 자가 선생의 명성이 높아짐을 시기하여 장령(掌令 : 사헌부 정4품관) 이승건의 경쟁심을 이용, 사주하여 무고로 탄핵하기를 “자기 재주를 믿고 임금에게 오만하고 교묘히 속여 명예를 구(釣名)하며 임금의 총애를 얻으려 한다.”는 등 몇 가지 사항을 들었다.
이에 주상이 “내 이 사람의 충직함을 잘 안다. 어찌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러나 대론(臺論)에 위법이 무겁다 하니 삭직하여 금녕(金寧; 즉 김해)에 가두어라.” 라고 하였다.
그러나 얼마 안 가서(17일 만에)주상은 죄가 아님을 살피고 특명을 내려 방면,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壬子復除正字上疏自劾乞免不 允又辭
<1489년 10월> 임자일(28일)(방면 8일 후) : 다시 정자(正字)에 제수됨에 상소하여 스스로를 탄핵하고 면직을 구걸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아 또 고사하다.
先生以爲遐鄕小臣濫叨淸要以致人言而待罪得官義所不安故連章辭免
선생은 멀리 고향에서 상소하기를 “소신은 외람되이 높은 요직을 탐하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인하여 대죄(待罪)하게 되었으며 관직을 얻었으되 그 직책을 불안하게 하였으므로 거듭 사면(辭免)을 청하는 글을 올립니다.”라고 하였다.
十一月戊午有 旨特除遼東質正官乘馹赴召丙寅拜 命丁卯辭朝卽行
<1489년>겨울 10월 11월 무오(4일) : 요동 질정관(質正官)[19]으로 제수하는 특별 교지가 내려 역마로 상경, 병인일(12일)에 배명하고 정묘일(13일)에 조정에 고별한 후 즉행하다.
[19] 질정관(質正官) : 조선시대 임시관직, 글의 음운이나 기타 사물의 의문점을 중국에 질문하여 시비를 바로잡는 일을 맡았다. 중국에 사신이 갈 때 함께 가기도 하였다.
以再被除 命事重出疆不敢辭○遼東有中洲與義州只隔一帶水氷合之後漫爲平地彼此人民互相往來交通買賣 上恐惹事端嘗移咨遼東都司以防混處而不能禁至是委奏? 天朝以先生有專對之才特 召而遣之 帝諭都司將遼民冒耕等處盡行抛荒立碑禁約以革住種之弊
사안이 나라 밖으로 떠나는 중요한 일이고 또 재차 제수하므로 감히 고사하지 못하고 배명하였다.
요동은 중주(中洲)에 있는데, 의주와는 다만 한 줄기 강물이 그 사이에 있는 곳으로서 얼어붙으며 평지가 되어 잇닿아지므로 피차의 인민이 서로 왕래 교통하면서 매매하였다. 임금은 이곳에서 사단(事端)이 야기될까 염려하여 일찍이 요동도사(遼東都司)에 공문을 보내어 서로 뒤섞여 사는 것을 방지하도록 요청하였으나 잘 금해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임금은 선생이 혼자 능히 응대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 판단, 천자(天子)의 조정에 주청하는 임무를 맡기기로 하고 특별히 소환하여 파견한 것이었다.
황제는 요동도사에게 유시하여 “장차 요동민으로 하여금 임자의 승낙없이 남의 땅에 농사를 짓거나 같이 거주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진력하라. 비석을 세워 금지조항을 약정하고 종족의 혼거(混居)에서 발생하는 폐단을 고치도록 하라.”하였다.
三年庚戌{先生二十七歲}
○ 1490년 경술 (성종 21년) 선생 27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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