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님께 전대사를 바치면서(1)
2008년 7월이었다.
목천 성당에서 전화가 왔다.
진천 성당에서 교적이 목천으로 왔다는것이다.
그동안은 관내에 성당이 없었다.
그래서 내 주소지가 충남인데도
충북인 진천 성당으로 다니는게 용인이 되었는데
이제는 목천에도 성당이 생겼으니
그리로 나오라는것이다.
7월 두 번째 주일인 13일
벼르고 별르다가
목천 성당으로 가서 이현봉 마태오 신부님을 만났다.
냉담자로 기록 되었는데 어떻게 된거냐 해서
솔직히 얘길 했다.
처음 한동안은 열심히 나갔지만
게으름의 타성 때문에 성당엘 나가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마음이 편칠 않았다.
2년째부터는 1년에 한번 정도 성당엘 나갔다.
밀린 교무금이라도 내면 성당에 못나간 죄를
조금이나마 탕감 받을지도 모른다는
얄팍한 핑계 때문이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신부님은
교적에서 <냉담>이란 말을 지우면서
“열심히 나오세요” 라고 무표정하게 얘길 했다.
미사를 드리면서 옛날 생각 했다.
38년전,
진천 성당에서 아버님의 영결 미사를 볼때
하느님께서는 내 기도에 응답을 해주셨다.
눈보라가 치는 날씨기 때문에
하관식 하는 인부들과 조객들이 고생을 할것 같아서
(하느님 제발 눈보라가 멎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저도 열심히 성당엘 다니겠습니다.)
그런데 기도를 하다가 눈가가 뜨듯해 져서
눈을 뜨고 보니 어느틈에 눈보라가 그치고
창 틈으로 밝은 햇살이 내 얼굴을 비추고 있었던것이다.
그날 하관식때는 날씨가 그렇게 청명 하고
포근해 질수가 없었다.
(우연의 일치겠지)
그리고 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그로부터 꼬박 20년이 지나서
53세의 나이에 나는 영세를 받았다.
그것도 어머님 때문이다.
중풍으로 꼼짝 못하시는 어머님을 휠체어에 태우고
주일마다 신갈 성당엘 나갔지만 나는 믿음이 없었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그러시드라 너도 성당엘 나오라고..”
어머님을 성당안으로 모시고 나면
나는 밖에 나와 담배를 피우는게 일이었다.
그러다가 성찬 전례가 이루어지면
다시 들어가 다른 신자분들이 영성체를 다 하길 기다렸다가
맨 마지막으로 어머님을 신부님 앞으로 안내 했다.
영성체가 끝나면 가 건물인 성당의 제단앞이 좁아서
휠체어가 돌아 나오질 못하기 때문에
다시 뒷걸음으로 물러 나왔고 그러는 나를
신부님과 수녀님이 기억하고 계셨던것이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내가 성당엘 나오기 바라는것은 어머님이셨고
신부님 수녀님은 그냥 끌어다 댄것임을 알고 있었다.
“한가지만 약속해 주면 나도 성당엘 다닐게”
“무슨 약속?”
“꼼짝 못하는 이 손가락..열개 다 움직이라는게 아냐
한 개만, 딱 한 개만 움직이게 해봐.
하느님이 그걸 들어 주신다면 나도 믿을게“
다녀야지 다녀야지 하면서도
바쁘다는핑계로 미적미적 미루어 왔기 때문에
말 막음으로 해본 소리였고
그런 사실조차도 나는 곧 잊고 말았다.
그러다가 작품 취재를 위해
한달 가까이 일본에 다녀오니
그동안 번갈아 가며 어머님을 간병 해온
동생들과 제수씨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어머님은
“너 약속 했다”
하시며 손바닥을 내 미셨다.
동생들은 의아해 했다. 무슨 약속을 했기에?
“아니 손가락이 움직여요?”
내가 반신반의 하며 보고 있는데
어머님이 힘들게...힘들게 손가락을 움직이셨다.
아아 그것도 한 개가 아니라 두 개씩이나...
나는 왈칵 눈물이 나왔다
그 손가락을 움직이게 할려고 얼마나 열심히 연습을 하셨을까?
아니,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응답이었고 기적이었다.
“알았어요 나 이제 하느님한테 발목 잡혔어요”
말할수 없는 감동을 느끼며 나는 울먹해서 소리를 쳤다.
왕년에 성당을 좀 다녔다는것을 감안해서
쉽사리 영세를 받을수가 있었다.
그것도 유아영세를 받는 자리에서
내가 유아들을 대표해서 사도신경을 외웠다
본명은 모이세
내나이 53세때였다.
어머님 타계하시고 나서
나는 그길로 고향으로 낙향을 했지만
쉬 뜨거워진 냄비처럼 나는 이내 잊어버렸고
그것이 오늘에 이르렀던 것이다.
(아니다 이제는 성당엘 나가자.
마음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불안한 마음을 털어버리자)
그래서 그날부터 주일날이면 꼬박 목천 성당엘 나갔다.
그러다가 8월15일
성모님 승천 하신날에 고백 성사를 보았다.
2년만이었다.
그리고 영성체를 했는데 그렇게 눈물이 날수가 없었다.
하느님은 두 번씩이나 내 기도에 응답해 주셨는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방황했다는
죄책감에서 오는 눈물이었다.
그리고 병원생활 10 개월째
두 번 다시 걸을수 없다던 아내가
기적적으로 걸어서 퇴원을 했다는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도 있었다.
그러던중 2008년 10월 12일에
대전 교구 설정 60주년 감사미사가 있는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이 날은 참석하는 모든이에게
전대사를 준다고 했다.
전대사?
나는 그런것이 있다는것도 처음 알았다.
시누이 두분이 수녀였고 딸까지 수녀로 보낸
청주 누이와 매부에게 전화를 걸어 알아보고
인터넷을 뒤져 전대사에 대해서 알아보았다